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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설자 May 10. 2020

쓰고, 읽고, 걸으며 나는 꿈꾼다

나의 작은 도전기

 

쓴다     


 드디어 내 앞에 광활한 시간이 펼쳐졌다. 30년이 넘는 직장 생활을 그만둔 날, 나는 주저 없이 떠났다. 2년 동안 낯선 곳을 돌아다니며 미뤄두었던 갈증을 풀고 나니, 조바심이 났다. 바쁘게 돌아가던 일상을 몸은 기억했다.  


 어느 날,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 On Writing>을 읽다가 눈이 번쩍 띄었다.

 ‘매일 2천 단어를 쓰라, 힘들면 천 단어도 좋다, 폭풍우가 오지 않는 한 매일 4마일을 걸었다.’      

나는 당장 목표를 세웠다.

“매일 천 단어 쓰기, 매일 6킬로 걷기, 세계문학 목록대로 읽기”


 어느 날 갑자기 다가온 전염의 시대는 우리는 꼼짝없이 가두어 놓았다. 일상은 깨졌고 누군가를 자유로이 만날 수 없었다. 내 삶은 무척 단순해졌다. 오전에 글을 쓰고 살림하고, 오후에 산책하고 책 읽고. 그런 날들이 100일 넘게 이어졌다. 쑥과 마늘을 먹지 않았지만 ‘곰이 인간으로 변하는’ 일이 나에게도 일어나고 있었다. 아침마다 두 시간씩 글을 쓰게 되었다.


 A4 두 쪽 반은 써야 천 단어가 조금 넘었다. 한 주제로 그렇게 쓰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한 쪽 쓰기를 이미 일 년 동안 했기에 도전할만한 했다. 천 단어를 채우느라 쥐어짜다 보면 무슨 글을 쓰고 있는지 갈피를 잡지 못할 때도 있었다. 내가 쓰는 언어는 허약하고 의미조차 빈약했다. 하지만 쓰노라면 언젠가 허약과 빈약 사이를 메꾸는 언어가 자라리라. 뼛속까지 내려가지는 못할지라도 피부 아래로라도 내려가고 싶었다.


 다음 날 쓸 주제를 정해 간단한 맵으로 그려 놓는다. 물론 그려둔 가지대로 써지는 것은 아니다. 쓰다 보면 가지치기가 이뤄지기도 하고, 다른 가지들이 자라나기도 했다. 문장은 다른 문장들을 불러왔다. 천 단어를 채우려면 어떻게든 더해야 했다. 쓴 글은 일주일이 지나서 다시 읽어본다. 빼기. 빼기는 더 어렵다. 그때마다 나는 제임스 설터를 생각한다.


“정말 그 단어가 최선의 단어인지 미심쩍어하면서 손 안에서 단어들이 이리저리 굴리며 느껴보는 거죠. 그 단어는 이 문장에서 어떤 전기적인 힘이 있는가? 뭔가 작용을 하는가? 전기적 힘이 너무 강하면 독자의 머리카락을 부스스 흐트러뜨리겠지요.”


단어를 손에 넣고 비벼보기. 그것을 연습한다.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곳에 이를 때까지 딱 맞는 말을 찾으려 애써야 한다는 것이다.


글쓰기는 언제나 ‘처음’이라는데, 쓸 때마다 나의 생도 언제나 ‘처음처럼’이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러니 어쨌든 쓴다.

         

 읽는다


 수첩 앞에 184번까지 있는 세계문학 목록을 붙여 놓았다. <안나 까레니나>부터 차례로 읽기 시작했다. 책꽂이에 있는 '목록 작품'들을 모두 꺼내 모아 놓고 다시 읽고 있다. 소파 옆에는 책이 탑처럼 쌓여 있다. 여러 권의 책을 늘어놓고 메뚜기 뛰듯 읽는다. 이상한 것은 서로 다 다른 책인데 각각이 연결되는 기분이 든다. 사실 세상은 한 권의 책이나 다름없다.


 요즘은 아룬다티 로이의 <작은 것들의 신>과 안규철의 <사물의 뒷모습>, 그리고 이소영의 <식물과 나>를 읽고 있다. 그중에는 매일 조금씩 읽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도 있다. 해마다 완독을 결심해도 1권을 읽다가 포기하곤 했는데 마의 벽을 넘고 4권 째다. 15년 동안 코르크로 완벽하게 차단한 방에서 써 내려간 의식의 흐름을 결코 다 이해할 수 없지만 힘든 것을 참고 읽는 이유가 있다. 영하 40도의 추위와 굶주림 속에, 언제 죽을지 모르는 가혹한 수용소에서 프루스트 강의를 들으며 인간이고자 한, 유제프 차프스키의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 속의 그들을 위해서, 항암 치료를 받으며 그 책을 읽고 있다는 뮌헨의 마리를 응원해주고 싶어서 읽는다. 올해 이 책 여섯 권은 끝을 볼 것이다.


 글을 쓰다가 어떤 문장의 출처를 찾으려 책꽂이를 뒤진다. 빈약한 서가지만 그래도 내가 애정 하는 책들이 빼곡하다. 오래된 책을 꺼내면, 그 책을 읽었던 젊은 어느 날로 돌아간다. 아이들이 잠든 시간에 쪼그리고 앉아 책장을 넘기며 먼 미래의 삶을 꿈꾸던 깊은 밤으로. 책에 그은 밑줄이 내 인생 어느 순간에 그어 놓은 선 같기도 하다.


도저히 쫓아갈 수 없는 ‘강 건너’ 문장에 밑줄을 긋는데,

밑줄을 그으면 그 문장이 내게로 올 것만 같은데,

누구는 어떤 문장 아래 선을 그으면 그 문장과 스킨십하는 기분이 든다고 하던데,


책을 덮는 순간 까맣게 잊지만, 그래도 밑줄을 긋고 메모를 하며 읽어야 비로소 책이 내게 걸어온다. 처음으로 문장이 내게 걸어올 때 내가 말을 어떻게 걸었는지 즉시 적어야 했다. 그순간에 나에게 걸어올 때 대답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마침내 책 표지를 덮을 때, 가슴 가득 차오르는 물결을 느낀다.

 글을 쓰려니 읽기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읽어야 할 시기에 놓친 책에서 얻었어야 할 감성이 내 발목을 사로잡았다. 읽고 싶은 책, 읽어야 할 책들이 쌓이고 그 높이만큼 나를 압박한다. 서두르지 말자. 날마다 읽으면 된다. 읽기와 쓰기는 한 몸이다. 읽어야 쓰기도 자유롭다.  그러니 어쨌든 읽는다.


걷는다


 오후 4시가 되면 한강으로 산책하러 간다. 4마일이면 약 6.436 킬로미터다. 강변을 따라 걷다가 돌아오는 길이 얼추 오륙 킬로미터는 된다. 스티븐 킹이 산책하는 길처럼 고요한 숲이 우거진 호숫가 둘레는 아니지만 꽃과 나무가 있고, 강물이 있으니 그만하면 나쁘지 않다.


5월 어린이대공원


 그곳에 외길이 있다. 어릴 적 좋아하던 오솔길을 닮은 곳이다. 그 길을 뚝 떼어다가 우리 집과 더 가까이에 놓고 싶은 마음이다. 싸리꽃길을 지나면 개나리꽃길이, 흰말채 길과 철쭉길이 길게 이어진다. 한쪽은 꽃길이 길게 이어지고 다른 쪽으로 나무 사이로 햇살에 반짝이는 강물이 들어온다. 노을 진 하늘에 번지는 바닐라 스카이. 나는 이 길을 사랑한다.


 날이 더워지자 새벽 산책으로 바꾸었다. 새벽길에 잠 못 드는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활짝 핀 달맞이꽃과 졸고 있는 달개비꽃을 보며 사부작사부작 걷는다. 새벽 공기가 얼굴을 쓰다듬는다. 다리 위로 올라서니 강 위를 넘어온 바람이 온몸을 훑고 지나간다. 온통 하늘이 붉게 물들어 있다. 언제나 해돋이는 장엄하다. 긴 햇살 기둥이 강물 위에 흔들린다. 멀리 빌딩들이 붉어지고 도시가 깨어난다. 새로 태어난 아침을 맞으며 나도 새로 태어난다.


 자연은 소리 없이 시간을 이끌고 간다. 산수유가 피고 목련이 피고 수수꽃다리가 피고 지고…. 아까시 꽃향기가 날리던 산책길에 매미 소리가 가득하다. 푸릇한 이파리에서  비린내 나는 날들이 이어지더니, 어느 틈에 고개를 쳐든 수크령이 가득하다. 가을이 가까이  있다.


 

산책하며 나는 묵은 생각을 비우고, 비운 자리에 새로운 생각으로 채운다.  틈을 감아 돌며 찰싹이는 강물 소리에  기울이면 ‘괜찮아, 괜찮아,  지나갈 거야.’ 자분자분 내게 속삭인다. 나는 대답처럼 강물 위로    띄워 보낸다.


   여름이 끝나갈 무렵
  뭉툭한 가지들에서 새잎이 돋아났어.
  철이 아니었지. 그래.
  하지만 나무들은 멈출  없었지. 그들은
  전신주처럼 보였지만
  신경 쓰지 않았어. 그리고 잎이  다음엔
  꽃이 폈어. 어떤 것들에겐
  철이 아닐 때가 없지.
  나도 그렇게 되길 꿈꾸고 있어.


                                      -메리 올리버 <허리케인>   


어떤 것들에겐 철이 아닐 때가 없다.

쓰고, 읽고, 걷는 것은.

나도 그렇게 되길 꿈꾸고 있다.        

       


2021년 <에세이작가 동인지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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