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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설자 Jul 30. 2020

비로소 나를 찾았다

나답게 하는 것

          

 그동안 나는 딸로서, 교사로서, 엄마로서, 아내로서, 이런저런 역할로서 오십 년 넘게 살아왔다. 세상에 독립된 인간으로 나왔지만 무엇이든 내 앞에 주어진 것은 반항 없이 순응하며 길들여졌다.

 스무 살 부터 교사로 근무한 학교 울타리가 내게 온세상이었다. 그저 나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 좋았다. 많은 꿈들이 있었지만 교사가 된 것이 천직이라고 여겼다. 35년이 넘는 기간은 그렇게 나를 길들였다.

 일상적인 삶과 교사로서의 삶 이외에 어떤 인생이 펼쳐질지, 학교를 벗어난 일은 생각해보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아이들을 잘 가르칠까 고민하고, 훌륭한 선생이 될 수 있을까 걸을 때도 생각하곤 하던 시절이 있었다. 매 순간 기, 승, 전이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을 가르칠 때 나는 진정한 존재감이 들었다. 기본적으로 공부는 재미있어야 한다는 생각이었기에 다양한 아이디어가 퐁퐁 솟아났다. 교육과정을 이탈하기도 하고 ‘교과서대로’ 가르치지 않은 적도 많았다. 통합교과가 나오기도 전에 이미 나는 그렇게 가르쳤다. 새로운 교육방법이 나오면 제일 먼저 시도했다. NIE 교육도 다른 선생님들은 잘 모르던 시기에 교육에 접목했다. 어쩌면 이렇게 아이들을 잘 가르칠까. 아이들의 마음을 잘 다독이고,  이렇게 훌륭한 태도로 아이들을 대할까. 스스로 만족하면서 자뻑에 빠져 살았다. 열정이 넘칠 때는 그랬다. 서서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매너리즘에 빠져들었고, 자존감이 바닥까지 내려가는 힘든 일도 만나게 되었다.

 

 누구나 리즈의 시절이 있다. 후반기 연이어 맡은 1학년을 하면서 나는 교사로서 최고의 행복을 누렸다. 그때가 절정이었다. 완벽한 교사였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아이들이 그렇게 예쁘고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학부모들도 나의 교육관을 모든 면에서 열성적으로 협조했다. 부모, 아이, 교사 우리는 혼연일체가 되었다. 아이들은 싸우지 않았다. 평화롭고 즐거웠다. 새로운 것을 배우며 아이들은 눈빛이 빛났다.

 나는 매일 학교에 가는 것이 행복했다. 아이들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돌봐줄 수 있었다. 매일 사과를 썰어 나누어 먹으며 훌륭한 아이들이 되는 ‘마술’을 걸었고, 아이들은 마술에 걸렸다. 그 조그만 손을 잡고 교문을 나설 때마다 나는 천국을 걸었다. 그 순간이 내 온 교사생활에서 최고의 정점을 찍고 있었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모든  일이 그렇듯 당연히 최고를 찍은 그래프는 하강 곡선을 그었다.

 

 두 해에 걸친 경험은 <야무지고 꼼꼼하게 선생님이 알려주는 초등 1학년>이라는 학부모 교육서를 기획하고 출판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봄방학 때 소파에서 딩글거리다가 헤어진 1학년 아이들이 보고 싶었다. 아이들과 있었던 일을 생각하니 마음이 따뜻해졌다.

 ‘왜 엄마들은 책가방을 좀 더 편리한 것으로 사 주지 않을까?’라는 생각까지 미쳤다. 당장 노트북을 열고 ‘입학을 앞둔 학부모님들께’라는 안내문을 쓰기 시작했다. 책가방이 단초가 된 글은 순식간에 몇십 페이지를 넘겼다. 내친김에 입학 전과 후 가정에서 아이들을 지도하기 위한 매뉴얼을 짜고 그것에 따라 글을 썼다. 1학년 학부모를 위한 안내서였지만 그것은 아이들을 사랑했던 기록이었다. 덕분에 나는 그 책을 쓰느라 학교 도서관에 있던 먼지 묻은 교육 관련 책을 모조리 읽게 되었다.


돌이켜보니 사랑하면 글이 되고,
힘든 줄 모르게 밤을 지새우며 쓰고,
그것이 남들에게 도움이 되는 더없이
좋은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어느 순간 더 이상 아이들과 소통 하기가 어렵다고 느껴진 날이 있었다. 그들 속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아이들과 나 사이에 어떤 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세대 차이였을까. 나는 다만 지시하고 물 위 기름처럼 그들을 지배하는 역할밖에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젊은 교사들에게 자리를 넘겨야 아이들에게 더 나은 교육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젊은 그들과는 경쟁이 되지 않았다. 낡은 매너리즘에 빠진 나는 더 이상 새로운 것을 줄 수 없었다. 때가 온 것이다. 정년 7년을 남기고 모두가 말리는 명퇴를 미련 없이 결정했다. 정작 남아야 할 분은 일찍 떠난다는 어느 선생님의 말씀은 엄청난 위로였다.


 직장에서 벗어나고서야 비로소 나와 온전히 마주할 수 있었다. 내가 겪지 않았던 세상을 새롭게 보게 되었다. 어쩌면 이런 시간이 평생 처음 주어졌기에 나는 마치 새로 태어난 것 같았다. 나를 얽매던 출퇴근과 각종 이해로 얽힌 조직과, 잘 가르쳐야 한다는 강박으로 나를 묶어 놓던 아이들까지 모두 내게서 멀어지고 나는 진정한 해방을 맞게 되었다.  그야말로 대한독립만세였다.

 나를 묶었던 그 모든 ‘규제’들에서 벗어나자 진정으로 자유로워졌다. 특히 교사라는 직업이 가져오는 제한된 행동의 울타리는 이제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아도 되었다. 나는 이제 교사가 아니었다. 나는 나로 살아도 되었다.  


 나는 엄청난 계획들을 세웠다. 우선 여행을 하고, 피아노 치기, 영어 공부하기, 골프 치기, 운동하기, 문화센터 가기... 마치 1교시부터 6교시로 시간표를 짜듯 촘촘히 짰다. 여행을 하고 돌아오면 얼마간 그것을 해내었다. 얼마 못 가 나가떨어졌다. 지나친 욕심으로 지레 지쳐버리고 말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다시 학교생활을 하고 있었던 거다. 그것은 아니었다. 내가 왜 일을 그만두었지? 이러려고 명퇴를 한 것은 아니었다.


 학교에 강사로 나와 달라는 부탁을 여러 번 받았지만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미안했지만 나는 다시 학교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학교 문을 나서는 순간 수십 년 동안 해 왔던 모든 일들이 일시에 머릿속에서 하얗게 포맷이 되고 말았다. 나만 그런 줄 알았더니 명퇴한 친구들이 모두 그런 말을 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한 직장에서 30년이 넘었다면 대통령도 부러워할 전문가가가 되어야 마땅한 일이었지만 내게 남은 것은 완전한 백지, 그것이었다.    


 시간이 해결해 줄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우선  낯선 곳으로 날아다녔다. 그동안 가고 싶었던 새로운 곳에서 나는 새로 태어나는 것 같았다. 사람들이 사는 모습은 어디나 비슷했다. 다른 문화와 다른 환경이 있을 뿐이었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 이웃 동네로 마실을 나가듯 다른 나라로 날아갔다. 지금까지 일한 나에게 그만한 보상은 해도 괜찮았다.


  

 여행을 다녀와서 얼마쯤 지나면 좀이 쑤셨다. 어디로 갈까. 매번 우리는 비행기를 탔다. 나 혼자만 떠나는 길이었다면 그리 쉽지 않았을 것이다. 마침 남편도 시간이 많았고 우리는 가고 싶은 곳이면 어디든 언제든 떠날 수 있었다. 나는 오직 ‘오늘’만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낯선 곳에 가서도 여전히 삶은 이어지고 생활은 계속되었다. 좋은 계절에 꽃피는 길을 걷고 낙엽을 밟을 수 있었다. 다른 나라의 음식을 먹고 낯선 골목길을 걸었다. 우리가 원하던 새로운 바람을 마음속에 불어넣었다. 이게 진짜 삶인 것 같았다.


 다녀와서 앨범을 만들고 여행기를 썼다. 동네 인쇄소에서 예쁘게 제본을 했다. 그동안 만든 앨범이 서른일곱 권, 여행기가 열세 권에 이르렀다. 여행기를 쓰면서 나는 다시 여행을 했고, 앨범을 보며 우리는 그곳으로 또 한 번 날아가곤 했다. 다녀온 적마다 커다란 세계 백지도에 색칠을 했다. 다음은 어디로 갈지 찾으며 행복했다.


 내가 원하는 일을 하며 살아도 되잖아.


누구에게 결재받고 허락받아야 하는 삶이 아니잖아. 우리의 다리가 허락하는 한, 우리의 경제가 허락하는 한, 이 백지도가 다 색칠이 될 때까지, 우리는 하늘을 날아가기로 했다. 마지막 여행지로 계획한 아이슬란드에서 오로라를 볼 때까지...

 전염의 시대는 우리를 꼼짝없이 묶어 놓았지만 이 시절도 언젠가는 지나갈 것이다. 그때가 오면 우리는 또 캐리어를 싸고, 어디론가 찾아 떠나고 백지도를 꺼내어 색칠을 할 것이다.           


프라하 어느 카페에서




  나는 늘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일기를 쓰고, 동시도 써 보고, 에세이도 쓰면서 문학의 언저리를 서성거리고 있었다. 몇 년 전, 손광성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고 수요일마다 조퇴까지 하면서 글을 배우러 다녔다. 두 시간 강의를 듣는 날은 내게 새 세상이 열렸다. 나는 글을 잘 쓰는 줄 알았다. 선생님의 평가를 들으며 나는 말린 대추처럼 쪼그라들었다.


 내 글은 정말 쓰레기였다. 마음을 드러내지도 못하고 꾸미고 포장한 허접한 포장지에 불과했다. 그러나 조금씩 내 글이 나아지는 것을 보며 나는 만족했다. 내가 만족하면 되는 거다. 내가 기쁘려고, 나에게 용기와 힘을 주려고 쓰는 거야, 터무니없었지만 이런 생각으로 글을 썼다. 그동안 쓴 글을 읽으면서 어디서 이런 기특한 생각이 들었을까, 글 쓰는 재주는 괜찮은 데가 있단 말이야, 자화자찬으로 스스로에게 용기를 주곤 했다.      


 처음 글쓰기를 배우면서 다른 사람들의 글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너무나 잘 쓰는 사람들이 많았고 내 글은 초라했다. 화려한 글을 쓰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어떤 경험 뒤에 이어지는 깊은 사유는 몇 년을 써도 따라가지 못할 것만 같았다. 영원히 그런 글은 쓰지 못할 지도 몰랐다. 사물 수필이나 지적 수필은 더 그랬다. 대상에서 파생되는 인문학적인 사유는 도무지 내 영역 이 아니었다. 나는 지적인  희열과 감동을 주는 글을 쓰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문학은 감동이라고 생각한다. 감동은 진정성에서 온다. 수필만큼 진정성이 있는 문학 영역은 없다. 아무리 허접한 이야기도 진정성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글은 누군가 읽으라고 쓰는 것이고,
읽고 마음에 파동이 있어야 하고,
파동이 의미 있는 변화를 이끌어내야
좋은 글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잔잔한 울림이 더 좋았다. 나는 그런 글을 쓰고 싶었다. 그게 나에게 맞았다. 어느 날 내가 쓴 글들을 읽어보다가 이건 뭐지? 생경한 느낌을 받았다. 처음 글을 쓸 때 기쁨에 넘쳐, 자신감에 넘쳐 쓰던, 나 자신의 원하던 글은 도망가고 내 마음과는 멀어진 글이 내 앞에 버티고 있었다. 내 문장은 어디로 간 거지? 나의 언어는 어디로 갔지? 나는 왜 내가 원하는 대로 쓰고 있지 않는 거지? 미숙하지만 그래도 내 영혼이 살아 있던 처음의 문장들은 어느새 남이 다듬어준 문장으로 앵무새처럼 나불대고 있었다.


  나만의 글을 찾아야 한다는 절박한 마음이 다가왔다. 합평이란 이름으로 도막도막 남의 생각을 끼워 넣는 것에 멀어지기로 했다. 오직 나의 글을 가지고 내 나름대로 내 속에서 불러주는 말을 받아쓰기로 했다. 그것이 내가 쓰려는 글이었다. 그동안 배운 것에 지나치게 매달려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만의 문체가 다 사라지고 선생님이 가르친 문장만 살아남았다. 그것은 내 글이 아니었다. 남의 글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스타일과 자신에 대한 영향력을 이용하되 자기만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중요하다.”


 헨리 밀러의 말대로 나는 내 문체를 찾아 내 스타일대로 쓰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모두 하고 싶었다. 나의 마음이 사라진 글에서 조금씩 내 스타일이 살아나는 듯했다. 그동안 어디론가 멀리 보내버린 아이를 되찾아온 기분이었다.


  나는 브런치를 읽기 시작했다. 살아 파닥거리는 글들이 하루에도 수백 개씩 걸렸다. 나는 여기 글들이 좋았다. 젊은 언어들이 좋았다. 읽으면서 내 안의 비늘들이 생생해지는 기분이었다. 나도 그들처럼 쓰고 싶었다. 브런치맨이 되었고 열심히 글을 올렸다.

 


  매일 아침 나는 글을 쓴다. 작년부터 무조건 한 주제로 매일 한 장을 채워보자. 그게 소박한 글쓰기 습관의 시작이었다. 올해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를 읽고 매일 천 단어 쓰기에 도전했다. 두  시간 정도 글을 쓰다 보면 보통 천백 단어가 넘었다. 양이 질을 좌우하는 날까지 그렇게 쓸 것이다.


글을 쓸 때
나는 마음이 열리고 내면의 평화를 얻는다.
글을 쓸 때 나는 행복하다.
글쓰기에 빠져 있을 때
나는 내 영혼이 빛나고 힘이 난다.

이것은 내게 거는 주문과도 같다. <앵무새 죽이기>를 쓴 하퍼 리가 말한 “글을 쓰는 것만이 나를 완전히 행복하게 해 준다.”는 그 경지에 오를 때까지.


  이제 나는 그 모든 역할들 앞에 작가로서의 삶을 가장 먼저 놓는다. 내가 좋아하는 것만 해도 되는 시간이 내 앞에 펼쳐져 있다. 밤을 지새워 글을 써도 되고, 하루 종일 내가 좋아하는 책을 읽어도 된다. 무료할 틈이 없다.

 이제 나는 나를 위해 산다. 내 안에 고여 있던 욕구를 마음대로 드러내며 살고 있다. 나는 원 없이 좋아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때마다 나는 진정 나다운 것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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