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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설자 Dec 10. 2020

행복의 순간

우리는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

          

 한 주에 두 박스 분량의 책을 읽는다는 작가 장석주. 시인이며 소설가이며 문학평론가인 그는 그 자체가 문학이다는 말을 듣는 기인이다. 그가 쓴 <행복에 대한 단상>을 읽다가 ‘행복이란 마음이 채워야 할 어떤 공허도 없을 때 온다.’는 말이 눈에 들어온다. 부족함이 느껴질 때 행복한 마음은 일어나지 않는다.

살아 숨 쉬는 순간은 행복의 순간이요, 지복의 순간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감지하고 즐길 줄 아는 마음이 있어야 행복을 느낄 수 있고, 행복은 누리는 주체의 역량이라는 것이다.


그에게 이런 것들이 행복의 순간이었다.


햇빛 한 줄기, 메아리, 소나무 숲의 향기, 물의 반짝임, 불쑥 솟은 작약과 모란의 붉은 움, 아이의 건강한 웃음소리, 이웃의 친절함, 평생 모은 돈을 사회에 내놓는 할머니들, 커다란 연잎 위에 떨어지는 초여름 빗방울들, 소나기 위 앞산 골에서 피어오르는 물안개, 새벽에 피어난 수련꽃, 옅은 휘발유 냄새가 나는 조간신문, 방금 구워낸 크루아상, 황금빛 맥주 첫 잔, 제주도의 산굼부리, 오름들, 그리고 비자나무 숲길, 앵두, 레몬향, 고소한 크림 스파게티, 구운 양고기, 창가에서 울리는 편종 소리, 바흐의 무반주 첼로 조곡, 제대로 만든 함흥냉면, 베트남 쌀국수, 팥빙수, 다정한 키스의 순간들, 선물 꼬리에 점박이 무늬가 선명한 나비...
이 모든 것들은 나를 행복하게 한다. 대개는 돈 없이 얻을 수 있는 것들이고, 살펴보면 이것들은 지천으로 널려 있다.      


 누군가 행복은 '훌륭하고 완결된 무언가로 녹아드는 경험, 이것이 바로 행복이다.'라고 했다. 내게 행복한 순간들은 언제일까. 무언가로 녹아드는 때는 언제일까.       


햇살에 반짝이는 나뭇잎들, 바람에 흔들리는 푸른 나뭇잎들, 가지만 남은 사이로 올려다본 파란 하늘, 늦가을 산길 벤치에 앉아 마시는 따뜻한 커피, 아무도 없는 거실에서 영화를 보는 시간, 막 다 읽은 책을 책꽂이에 꽂고 가지런한 책장을 바라볼 때, 깨알같이 써 놓은 노트, 그 옆에 그린 작은 그림, 늦은 밤 그와 나누는 가벼운 말들, 어린 날 아이들 사진, 물기가 묻은 반짝이는 사과, 활짝 열린 흰 격자 창문에 핀 제라늄, 모닥불, 고향집 마당에 널린, 바람에 살랑이는 빨래. 흘러가는 구름들, 운동장에서 들리는 아이들 함성소리,


늦가을 햇살에 반짝이는 남천


 문 틈으로 들어온 바람에 흰 커튼의 불룩하게 커졌다 작아지는 부드러운 움직임, 에바 알머슨의 그림,   베토벤 소나타, 찌개가 끓는 소리, 들꽃이 무리 지어 핀 들판에 부는 엷은 바람, 4월이 되어 살갗에 닿는 서늘한 수돗물, 오물거리며 풀을 뜯어먹을 때 움직이는 토끼 수염, 시나몬 빵을 굽는 냄새, 금방 지은 고슬고슬한 밥, 가지런히 썰어 접시에 담긴 막 익어가는 김치, 여행 가방을 쌀 때, 잘 다듬어진 잔디밭을 걸을 때, 물가에 핀 칸나, 맑은 물속에 잠긴 자갈들, 그가 이불을 덮어 줄 때, 주말 늦은 밤 딸과 이야기할 때,


 서희가 가져온 꽃을 꽂고 볼 때, 살짝 친 공이 도록 하고 홀 안에 들어가는 소리, 손 잡고 걷는 노부부, 깔깔거리는 중학생들, 내 책상 주변에 몰려와 턱 괴고 나를 올려다보는 일학년 아이들, 아이가 내민 주머니 속 먼지 보푸라기가 묻은 햇감자 한 알, 바람에 날리는 억새, 바스락거리는 낙엽을 밟는 소리 그 냄새, 숲 속 길게 뻗은 오솔길, 보드라운 털이 목에 닿을 때, 티라미수 한 조각, 늦은 밤까지 책을 읽어도 알람이 깨우지 않는 아침, 하얀 운동화를 신고 걸을 때, 남쪽으로 무리 지어 학익진 모양으로 날아가는 한 무리 철새들, 푸른 풀 위에 고인 투명한 빗물, 비눗방울을 날리는 아이들, 강물에 내린 반짝이는 햇살, 조약돌 사이로 흐르는 맑은 물소리, 맨발로 걷는 바닷가에서 밀려왔다가 발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바닷물,


 눈 길을 밟는 소리, 되새김질하듯 느릿느릿 음식을 씹는 시간, 욕실에 나란히 걸린 희고 부드러운 40수 수건, 잘 다듬어진 야채들을 씻고 소쿠리에 얹어 놓을 때, 함께 웃는 TV 속 어떤 가족들, 새 다이어리에 이제 막 다 읽은 책 제목을 쓸 때, 누군가에게 글을 읽어줄 때, 낯선 나라에서 누군가 웃어줄 때, 산책길에 바람에 머리가 날릴 때, 봄바람이 귀에 스치며 머리를 부드럽게 날릴 때, 노을이 붉게 물든 하늘, 밝아오는 아침 낯선 풍경 속에서 들려오는 테니스 치는 소리, 맑은 국수에 가지런히 올린 고명, 갓 피어난 노란 민들레, 방금 잠에서 깬 아기 얼굴, 흰 쌀알 같은 이가 돋아난 웃는 아기,  포동포동한 아기의 손과 발을 만질 때….  

 

 쓰다 보니 좋은 순간이 이렇게나 많은 걸. 이렇게 쓰는 시간이 또 행복했다.


행복이란 사막의 모래 알갱이 하나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연금술사의 말처럼 행복한 순간들은 그리 대단하지 않다. 내 주변에 흩어져 있는 것들이다. 바쁘고 서둘러 살 때는 몰랐던 것들이다. 잘 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느낄 여유도 없었다. 이제 그것들이 보이는 눈이, 감지할 수 있음이 고마울 뿐이다. 작은 것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행복은 머물지 않고 지나간다. 찰나의 행복이 수없이 모여져서 지나고 나면  시절이 온통 행복으로 물든 시절이라고 느끼는 것이다. 지나온 시절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은 지금 행복을 느끼는 바탕이  테니까.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은 주관적이다. 자꾸 행복하다고 생각하면 또 다른 행복을 불러온다. 그것이 끌어당김의 비밀이다. 행복한 사람들은 자꾸만 행복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다. 그는 < 행복에 대한 단상>을 이렇게 마무리한다.


행복은 깨지고 쉽고 덧없다 하더라도
그것을 추구하는 일은 숭고하다.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


새잎이 다시 돋아난 버들. 이 겨울에..

 전염병이 우리에게 많은 자유의지를 빼앗아 가버렸지만 그래도 우리는 행복할 거리들을 찾을  있다. 그것을 한없이 추구하려 하는  우리는 행복할 것이다. 우리는 모두 행복할 권리가 있다.


너새니얼 호손이 그랬다지. “행복은 우리가 말하지 않아도 어깨에 내려앉는 나비와 같다.”이미 그렇게 행복은 우리 어깨 위에 앉아 있는 건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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