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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설자 May 15. 2021

라면 먹을래?

우리 인생의 어느 한  때

              

 그날도 오늘처럼 꾸리꾸리 했어요.

책을 읽고 있는데 그가 은행에 다녀오자고 하네요. 늘 인터넷 뱅킹만 했으니 이제는 금전지출용지를 쓰지 않는 것도 모르고 오티피 카드도 이제서 발급받고.


“송금을 무제한으로 해 주세요.”

직원이 무제한은 없고요 일회 1억씩 5회 오억까지 가능해요, 하면서 살짝 웃네요. (무제한으로 송금할 수 있는 돈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는 막 학교에 들어가 글을 배우는 초등학생처럼 직원이 하라는 대로 고분고분 따라 하네요. 직원은, 그런 아이를 안내하는 친절한 선생님 같았고요. 멋쩍어하는 그의 모습에 웃음이 나왔어요.

  

비가 쏟아지려는지 잔뜩 흐렸어요. 집에 도착하자 기다렸다는 듯 비가 내리기 시작했어요. 이 비에 아파트 현관 앞 작은 화단에 돋아난 상추 싹이 더 자랄 것 같았어요.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사운드 엔지니어로 소리를 녹음하는 일을 하는 상우(유지태 분)와 피디인 은수(이영애 분)는 같이 일하다가 사랑에 빠지고 말아요. 은수가 마음을 열게  어느 , 상우에게 그런 말을 해요.


“라면 먹고 갈래요?”


 그 말 이후에 진한 사랑이 이어졌고요. 이후 그 말은 연인을 유혹하는, 누군가에게 작업할 때 에둘러 말하는 멘트로 알려지게 되었다는군요.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은 라면이 땡기는 날이지요. 그가 오면 라면 먹을래요? 나도 그리 하려고 생각했어요. 마침 그가 다른 볼일을 보고 들어왔어요. 우산에도 잠바에도 빗물이 흘러 젖어 있었어요. 우산을 베란다에 펼쳐 놓으며 그가 말했어요.

“라면 먹자.”

“안 그래도 라면 먹고 싶었어. “

나도 그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냄비를 올리고 파를 꺼내 썰었어요.

“근데 라면 먹고 갈래요? 가 작업 거는 유명한 말이라는데?”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 서로를 알아가는 연애 초입 썸타는 사람들처럼 라면을 먹을 예정이에요. 쏭쏭 썬 파를 넣고 계란을 탁 터트려 넣었어요. 라면 냄새가 거실에 가득했어요. 딱 먹기 좋은 오들오들한 식감일 때 냄비를 내렸어요. 그 순간이 지나면 맛이 없어지거든요. 호로록호로록 라면을 먹었어요. 파는 다 내가 건져 먹었고요.


설거지를 하는 동안, 그가 커피 물을 끓이고 내가 먹는 커피도 나란히 가져다 놓고 커피를 탔어요. 비가 오는 날은 달달한 믹스를 먹어야 해요. 우리는 커피를 마시며 독 마틴을 보기로 했어요.


 작년에 시리즈 8까지 내리보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시즌 9가 나왔네요. 아끼면서  보고 있어요. 티비를 볼 때는 카우치 포테이토가 필요하지요. 한 편이 끝나기도 전에 곧  입이 심심했어요. 방금 라면을 먹었는데 말이지요. 보스락지가 먹고 싶어지네요.

“과자 먹고 싶지?”

“그거 있잖아, 고구마 과자! “


 비옷을 걸치고 사러 나섰어요. 먹고 싶은 것은 못 참거든요. 과자를 담고 오려고 에코백도 들고 나섰어요. 비가 제법 많이 오고 싸늘한 공기가 치마 속으로 들어왔어요. 집 앞 편의점에서 내가 좋아하는 짱구와 고구마 과자, 막대 과자, 와사비맛 아몬드를 샀어요.


 과자봉지를 가위로 잘라 꼭지가 달린 그릇에 세 가지 과자를 부어 섞었어요. 과자를 준비할 동안 그는 소파 가운데에 떡 하니 앉았네요. 과자 그릇 하나씩 들고 뽀삭거리며 다시 독 마틴을 틀었어요.


공사장 벽에 누가 이런 재치 있는 그림을 그렸네요!!



보라색 와사비맛 아몬드는 벨기에 여행 갔을 때 일행인 큰언니들이 매일 버스 안에서 우리에게 주시곤 했어요. 쌉쌀하고 톡 쏘는 고추 냉이 맛이 나는 아몬드를 씹으면 그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았어요.


 비 내리는 브뤼헤 작은 호수 위에 떠 있는 백조들이 떠올랐어요. 햇살이 쏟아지는 브뤼헤는 동화처럼 아름다운 곳이지만, 비 올 때 돌아보는 것도 기억에 남았어요. 마차를 같이 타고 따각거리면서 작은 동네를 돌고는 비 오는 광장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던 모습이 떠오르네요. 다시 여행의 시대가 오면 그곳에 다시 가고 싶네요. 르네 마그리트 미술관도 가 보고...


 그 언니들은 잘 지내고 있을까. 이 시대 어디 놀러 가지 못해 얼마나 갑갑할까. 우리에게 참 잘해줬는데... 우리를 많이 예뻐해 줬는데... 그런 이야기를 하며 아쉬워했어요.

  

과자를 하나씩 입에 넣고 뽀삭거리면서 드라마를 보고 있어요. 문득 그가 과자를 입에 넣는 동작과 내가 과자를 먹는 동작이 동시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보였어요. 내 옆에 앉은 그도 나와 똑같은 속도로 과자를 입에 넣고 과자가 부서지는 소리가 똑같이 잇새로 새어 나왔어요. 얼빠진 모습으로 로봇처럼 오른팔을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우물거리는 모습을 티비 속 마틴이 보면서 도리어 웃기지 않을까요?


 아무튼 우리는 그런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독 마틴을 보고 있었어요. 보기만 해도 웃기는 마틴의 표정, 어리석지만 때로는 형사의 기민함을 발휘하기도 하는 펜헤일, 어리석은 결정으로 힘든 일을 겪지만 늘 긍정적으로 이겨내는 순박한 알과 버트... 모두 빈 구석을 하나씩 가지고 있는 캐릭터들에게 무한 애정이 가네요. 매력적인 드라마예요. 아끼며 보았는데도 금방 다 보고 10탄을 기다리네요. 언제 나올지 모르지만 다른 시즌일지도 모르겠네요.


 조용한 집, 밖에는 비가 오고 우리는 과자를 먹으며 둘이 앉아 티비를 보고 있는...

시간이 흘러 우리 인생을 되돌아보았을 때 이렇게 사소한 한 순간이 떠오를 것 같네요. 와사비 아몬드를 오도독오도독 씹으면서 <독 마틴>을 보는 우리 모습이. 무릎에 이불을 덮고 과자 그릇을 하나씩 들고 뽀삭이며 티비에 넋을 놓고 있는 우리 모습이.   


금낭화가 다정하네요.



 행복은 순간이고 곧바로 사라지고 잊히지만, 작은 한 순간들이 모여 우리 인생이 햇빛에 빛나는 물방울처럼 반짝일지도요.   


 라면을 먹고 우리는 영화처럼 에로틱 해지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한 때를 보내며 우리의 봄날도 가고 있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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