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적>을 부르던 선배
1979년. 그때 나는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그날은 이상하게 일찍 일어나 걸어서 학교로 올라가고 있었다. 자취하던 나는 아침은 먹었는지 기억이 없지만 그날 음침하던 공기는 기억난다. 10월 하순인데도 습한 것 같기도 하고 더운 것 같기도 한 무거운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학교에 갔더니 친구들이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몇몇은 떡진 머리카락을 올리며 문제집을 풀고, 몇몇은 허리띠를 풀고(교복 상의 주름이 있는 벨트가 달린 교복이었다.) 깔깔 웃으며 수다를 떨고 있거나, 몇몇은 밤새워 공부하고 엎어져 자는, 그런 풍경이 있어야 했다.
그런데 평소와 다른 침통한 교실 분위기에 나는 어리둥절했다. 심지어 우는 친구도 여럿 있었다. 술을 먹다가 측근을 암살하는 것은 영화에서나 보았는데. 나라에 큰 일이 벌어진 거였다. 그렇게 우리는 역사의 한가운데서 어리둥절했다.
80년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멀리 떨어진 제주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원하는 곳은 아니지만 어쨌건 대학생이 되었다. 부모님과 온 가족이 교대에 가길 원했지만 나는 서울로 가고 싶었다. 몰래 원서를 쓰고 면접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으나 접어야 했다. 교대에 입학하고 온갖 불쌍한 말은 모두 동원하여 장학금을 신청하였고 한 학기에 오만 원만 내고 다녔다.
나는 교대가 싫었다. 더 넓은 데서 더 큰 대학에서 더 심오한 것들을 배우고 싶었다.- 심오한 것이 뭔지 모르지만 - 막 입학했을 때 동아리(그때는 서클이라고 했다.) 선배들이 모임을 선전하고 다녔다. 나는 혜순이와 항상 함께 다니곤 했는데 한 선배가 우리에게 왔다. 우리는 그 서클이 마음에 들었다. 교대 학생은 몇 명 없고 제주대와 한라대학 학생들이 모인서클이었다. 서슬 퍼렇던 시절, 나는 어쩌다 다른 대학 연합동아리 이념서클에 들어가게 되었다.
나는 모임에 자주 나갔다. 이념에는 관심이 없고 거기 한 선배가 좋아서였다. 그는 다부진 몸에 강인한 인상이었다. 그때 유행하는 잠자리 안경을 끼고 각진 옷을 입었다. 웃을 때는 흰 이가 빛났다. 선배는 교대에서 그 서클에 새로 들어온 두 명뿐인 우리에게 참 잘해주었다. 우리도 병아리처럼 그 선배를 따라다녔다.
그때 처음으로 사회과학 서적들을 알게 되었다. <역사란 무엇인가>, <전환시대의 논리>, <중국의 붉은 별>, <해방 전후사의 인식>... 서클에서 준 책 목록을 받고 도서관에서 몇 권을 빌려 읽었다. 말랑말랑한 사랑 이야기가 아닌 딱딱한 어휘들로 가득 채워진 책은 도무지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우리가 배운 사회가 다른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과 우리가 배워 온 사회가 다르다는 것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이제까지 알던 세상과는 너무도 달랐다.
서클 모임은 자주 있었다. 갈 때마다 책을 읽고 토론을 했는데 무슨 말인지 나는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조금씩 눈이 열리면서 한 차원 높아진 기분에 사뭇 진지해졌다. 온통 사회가 부조리했다. 불합리하고 불평등했다. 빈부 격차와 권력과 소외, 사회주의와 민주주의 같은 이슈들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엠티도 갔다. 목장 한가운데 있는 허름한 산장 같은 데 가서 밤새고 책을 읽은 것을 토론하고 노래도 불렀다. 그런 과정을 ‘의식화’라고 했다.
나라가 정해준 사회와 역사를 배운 나는 새로 알게 된 세상이 좀 두려웠다. 의식화를 거치면 데모를 하는 대학생이 되는 것인가? 서울대에 다니는 선배가 와서 참석하기도 했다. 다음날 학교에 가면 사라지는 학우들이 있다는 말에 겁이 났다.
서클 안에는 우리가 따르던 선배 말고도 나이가 들어 보이는 해양수산과에 다니는 선배가 있었다. 알이 두꺼운 안경을 쓰고 수염도 제대로 깎지 않고 다녔다. 정말 산중에 삼 년은 숨어 살다 내려온 사람 같았다. 덥수룩한 수염은 희기까지 해서 나이 들어 보였지만 커다란 눈은 깊고 빛났다. 잘 웃던 그는 서클에서 기둥 같은 사람이었다. 앞에서 이끌지는 않았지만 뒤에서 수레에 태우고 밀고 가는 사람 같았다.
어느 날, 한라산에 엠티를 가게 되었다. 밤을 새우며 우리는 토론을 하고 노래도 부를때는 서늘하기도 하고 울컥하기도 했다. 감자를 썰어 카레도 하고 찌개도 끓였다. 우리는 공주처럼 가만히 있다가 선배들이 해주면 먹기만 하면 되었다.
음식을 먹을 때 해양수산과 선배는 정말 어마어마했다. 커다란 양푼에 담은 자기 몫을 다 먹고, 우리가 남긴 밥을 모두 부었다. 김치나 단무지 같은 남은 음식도 모두 쓸어 담아 비볐다. 그 비빈 음식을 숟가락 가득 떠 먹고는 사설인지 판소리인지 모르는 노래를 불렀다. 어떤 구절에서는 밥알이 튀어나오기도 하고 어떤 구절을 말할 때는 눈빛이 무섭게 빛나기도 했다.
시(詩)를 쓰되 좀스럽게 쓰지 말고 똑 이렇게 쓰럇다.
내 어쩌다 붓끝이 험한 죄로 칠전에 끌려가
볼기를 맞은 지도 하도 오래라 삭신이 근질근질
방정맞은 조동아리 손목댕이 오물오물 수물수물
뭐든 자꾸 쓰고 싶어 견딜 수가 없으니, 에라 모르겄다
볼기가 확확 불이 나게 맞을 때는 맞더라도
내 별별 이상한 도둑이야길 하나 쓰것다.
옛날도, 먼 옛날 상달 초사훗날 백두산아래 나라선 뒷날
배꼽으로 보고 똥구멍으로 듣던 중엔 으뜸
아동방(我東方)이 바야흐로 단군아래 으뜸
으뜸가는 태평 태평 태평성대라
그 무슨 가난이 있겠느냐 도둑이 있겠느냐
포식한 농민은 배터져 죽는 게 일쑤요
비단옷 신물나서 사시장철 벗고 사니
고재봉 제 비록 도둑이라곤 하나
공자님 당년에고 도척이 났고
부정부패 가렴주구 처처에 그득하나
요순시절에도 시흉은 있었으니
아마도 현군양상(賢君良相)인들 세상 버릇 도벽(盜癖)이야
여든까지 차마 어찌할 수 있겠느냐
서울이라 장안 한복판에 다섯 도둑이 모여 살았겄다.
남녘은 똥덩어리 둥둥
구정물 한강가에 동빙고동 우뚝
북녘은 털빠진 닭똥구멍 민둥
벗은 산 만장아래 성북동 수유동 뾰죽
남북간에 오종종종종 판잣집 다닥다닥
게딱지 다닥 코딱지 다닥 그 위에 불쑥
장충동 약수동 솟을 대문 제멋대로 와장창
저 솟고 싶은 대로 솟구쳐 올라 삐까번쩍
으리으리 꽃궁궐에 밤낮으로 풍악이 질펀 떡치는 소리 쿵떡
예가 바로 재벌(狾䋢), 국회의원(匊獪狋猿), 고급공무원(跍礏功無獂), 장성(長猩), 장차관(瞕犭差矔)이라 이름하는,
간뗑이 부어 남산하고 목질기기가 동탁배꼽 같은
천하흉포 오적(五賊)의 소굴이렷다.
사람마다 뱃속이 오장육보로 되었으되
이놈들의 배안에는 큰 황소불알만한 도둑보가 겉붙어 오장칠보,
본시 한 왕초에게 도둑질을 배웠으나 재조는 각각이라
밤낮없이 도둑질만 일삼으니 그 재조 또한 신기(神技)에 이르렀것다.
하루는 다섯 놈이 모여
십 년 전 이맘때 우리 서로 피로써 맹세코 도둑질을 개업한 뒤
날이 날로 느느니 기술이요 쌓이느니 황금이라, 황금 십 만 근을 걸어놓고 그간에 일취월장 묘기(妙技)를 어디 한번 서로 겨룸이 어떠한가
이렇게 뜻을 모아 도(盜)짜 한자 크게 써 걸어놓고 도둑시합을 벌이는데
때는 양춘가절(陽春佳節)이라 날씨는 화창, 바람은 건듯, 구름은 둥실
저마다 골프채 하나씩 비껴들고 꼰아잡고
행여 질세라 다투어 내달아 비전(泌傳)의 신기(神技)를 자랑해쌌는다.
첫째 도둑 나온다 재벌(狾䋢)이란 놈 나온다
돈으로 옷 해 입고 돈으로 모자 해 쓰고 돈으로 구두 해 신고 돈으로 장갑 해 끼고
금시계, 금반지, 금팔찌, 금단추, 금 넥타이핀, 금 카후스 보턴, 금박클, 금니빨, 금손톱, 금발톱, 금작크, 금시계줄.
디룩디룩 방댕이, 불룩불룩 아랫배, 방귀를 뽕뽕 뀌며 아그작 아그작 나온다
저놈 재조봐라 저 제별(狾䋢)놈 재조 봐라
장관은 노랗게 굽고 차관은 벌겋게 삶아
초 치고 간장 치고 계자 치고 고추장 치고 미원까지 톡톡 쳐서 실고추 과 마늘 곁들여 낼름
세금 받은 은행돈, 외국서 빚낸 돈, 왼갖 특혜 좋은 이권은 모조리 꿀꺽
이쁜 년 꾀어서 첩 삼아 밤낮으로 작신작신 새끼 까기 여념 없다
수두룩 까낸 딸년들 모조리 칼 쥔 놈께 시앗으로 밤참에 진상하여
귀뜀에 정보 얻고 수의계약 낙찰시켜 헐값에 땅 샀다가 길 뚫리면 한몫 잡고
천(千)원 공사(工事) 오원에 쓱싹, 노동자 임금은 언제나 외상 외상
둘러치는 재조는 손오공 할애비요 구워삶는 재조는 뙤놈 술수 뺨치겄다.
- 김지하 오적(五賊) 부분
첫째 도둑 나오신다, 하며 양푼을 끌어안고 장단을 두들기며 읊었다. 거친 욕을 할 때는 입안에 밥풀이 마구 튀어나왔다. 온갖 음식을 비빈 것이 마치 그 이야기 같았다. 가만히 듣다 보니 장관을 욕하고 정치가들의 부패를 욕하고 재벌을 욕하는 내용이었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 듣는 내용이라 충격을 받았다. 그는 타령을 하며 웃었지만 그의 눈은 빛이 났다. 물기가 어렸다. 어쨌든 그 많은 밥을 다 먹을 때까지 타령은 이어졌다. 나에겐 그것이 판소리로 들렸다.
나중에서야 김지하의 <오적>이라는 걸 알았다. 재벌과 국회의원과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을 풍자한, 한자도 김지하가 만들어 쓴 시. 정인숙이란 이름도 그때 처음 들었다. 그 선배가 그렇게 긴 시를 다 맞게 외웠는지 알 수는 없다. 내가 모르는 시였으니…
1년 후 발령이 났고 나는 교사가 되었다. 두 번인가 동기와 그 선배가 내가 근무하는 학교에 온 적이 있었다. 우리는 화순 바닷가에 가서 이야기도 나눴다. 밥이라도 사 주었는지 모르겠다. 가난한 대학생이 버스 타고 그렇게 멀리까지 왔는데 차비라도 주었는지 쌀쌀맞게 대한 것은 아닌지. 직장에 다니고 돈을 벌었으니 서클에 나가 밥도 사 주고 막걸리도 사 주고 했었어야 하는 건데. 그랬는지 어쨌는지 기억이 없다.
어쩐지 교단에 있으면서 그런 언더 서클과 인연을 맺고 있으면 안 될 것만 같았다. 정권에 대항하는 이념 서클이었고 그것은 불온하게 여겨졌다.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불온한 단체와 만나면 안 될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나는 ‘의식화’가 덜 된 거였다. 참 왜 그리 철딱서니 없었나 모르겠다.
어느 날 학교로 엽서가 날아왔다. 오스트렐리아 소인이 찍혔던 것 같다. 망망대해에 떠 있는 커다란 배가 그려진 엽서였다. 해양학과에 다니던 선배가 보낸 엽서였다. 그는 졸업하고 원양어선을 타고 먼 나라에 나간 것이었다. 만년필로 쓴 달필을 보니 수염이 휘날리는 선배가 떠올랐다. 내용이 기억나지 않지만 그동안 안부였을 것이다.
뱃머리에서 오적을 외치고 있을 선배 얼굴이 떠올랐지만 나는 답장을 하지 못했다. 일정치 않은 주소였으니 받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미루다가 그냥 흘려보내고 그 선배가 보냈던 엽서도 그만 다 잊고 말았다..
얼마 전 오적을 쓴 시인이 고인이 되었다. 그 뉴스를 들으니 다시 그 선배가 떠올랐다. 고국에서 멀리 떨어진 어느 망망대해에서 오적을 시원하게 부르고 있었을 선배가 그려지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