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여자가 걷는 길
세 여자가 걷고 있습니다. 영이 언니, 수니, 나 이렇게 셋은 보통 한 달에 두 번 정도 만나 둘레길을 걷습니다. 처음에는 양평 물소리길부터 시작했습니다. 그 길 이름이 예뻐서 모임 이름도 ‘물소리’로 지었습니다.
물소리길은 남한강을 따라 이어진 여섯 코스로 문화유적길, 터널이 있는 기찻길, 버드나무나루께길, 흑천길, 용문산은행나무길, 강변이야기길 이렇게 양수역에서 용문역까지 옛길을 이어 만든 올레길입니다. 물이 있고 풍경이 고요해 참 아름다운 길입니다. 코로나가 한창 맹위를 떨치고 나서 가을부터 걷기 시작했습니다.
여섯 길이 모두 예쁘지만 나는 흑천길이 제일 좋았습니다. 강이 깊어 검은색으로 보인다 하여 흑천길이라 부릅니다. 강 따라 오솔길이 길게 이어지고 고요한 그 길을 걸을 때가 좋았습니다. 이 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너에게 가려고
나는 강을 만들었다
검은 물소리를 들려주었고
물소리는 흰 새 떼를 날려보냈고
흰 새 떼는 눈발을 몰고 왔고
눈발은 울음을 터트렸고
울음은 강을 만들었다
너에게 가려고
- 안도현 <강> 전문
다른 길도 그때그때 분위기에 따라 색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모두 편안하고 행복한 길입니다. 평일에 걷기에 사람이 없어서 더 좋습니다. 오직 푸른 하늘과 구름과 새소리와 물소리와 곡식이 익어가는 냄새, 자태를 뽐내는 나무들과 비릿한 풀내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 고요하고 한적한 길을 걸으며 나는 그동안 쌓인 생각의 찌꺼기를 버립니다.
작년에는 벼가 익어갈 때쯤 시작해서 커피를 따른 컵을 두 손으로 감싸면 따듯한 온기가 몸으로 퍼지는 기운이 느껴질 때까지 걸었는데 올해는 봄부터 시작했습니다. 푸른 강 위에 벚꽃이 어리고 부드러운 바람이 얼굴을 스치는 봄 길부터 연두가 짙어가는 싱그런 길을 유월까지 걸었습니다. 날이 더 더워지면 물소리 길 방학을 하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같은 학교에서 만난 지 벌써 15년이 되어갑니다. 말이 잘 통하고 서로를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가족 같습니다. 까탈스런 성격이 없어 셋이 궁합이 잘 맞고 서로를 위해줍니다. 독단적이지 않고 서로 의견을 맞추어줍니다. 언니는 언니답게 중요한 결정을 하고 동생들을 우쭈우쭈 북돋아줍니다. 수니는 앞뒤를 따져 분명하게 결정하고 깊이 생각하여 행동합니다. 나는 즉흥적인 데다가 분위기를 띄우고 타협을 잘합니다. 셋이면 둘이 가까워지고 한 사람이 다소 배제되기 십상인데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물소리 길을 걸으며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합니다. 어쩌면 같이 만나 이야기하는 길이어서 더 좋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동안 쌓인 이야기, 가족들 이야기, 남편과 아이들 흉보기, (흉보기로 시작했지만 가만히 들어보면 자랑질입니다.) 좋은 일 자랑질 하기, 그런 자랑질에도 질투하지 않고 들어줍니다. 마음껏 자랑을 할 수 있는 관계, 자랑을 들어도 배가 아프지 않은 관계, 그것을 진심으로 기뻐해 주는 관계가 진짜 좋은 관계일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가 가장 많이 하는 이야기는 학교 이야기입니다. 이제는 모두 학교를 떠나왔어도 늘 마음이 그리 향하는 것은 어쩔 수 없나 봅니다. 때로는 수업을 해야 하는데 아이들이 교실에 없어 찾으러 다니는 꿈을 꾸거나, 소풍 가서 아이들을 잃어버려 쩔쩔매며 진땀을 흘리다 꿈에서 깬다는 이야기도 합니다. 학교에서 나온 지 몇 년씩 되어가지만 가끔씩 그런 꿈을 꾸는 것을 보면 아직도 학교에 마음이 가 있는 거겠지요. 마스크 시절에 공부하는 아이들도, 선생님들도 힘들겠다는 말을 하며 교실에 서 있는 기분이 되기도 합니다. 모두가 학교에 있을 때 더 아이들에게 잘해주지 못한 아쉬움을 이야기합니다. 그래도 각자 최선을 다했음에도 늘 모자라게 여겨지는 것이지요.
우리는 각자 알아서 간식을 가져옵니다. 어쩌다 처음에 수니는 커피를 가져오고 언니는 사과를 가져오고 나는 사르르 빵을 사 갔는데 그게 굳어져 으레 다음에는 그렇게 준비하고 갑니다. 언니는 과일을 가져올 때, 꼭 스텐 포크를 들고 옵니다. 통도 유리통에 담아옵니다. 무거운데도 꼭 그렇게 챙겨 오십니다. 그때마다 대접받는 기분이 듭니다. 언니는 가끔 코스트코에 다녀왔다면서 커다란 하인즈 케첩도 가져오고 옥수수 캔도 가져옵니다. 그 무거운 것을 끝까지 배낭에 메고 다니다가 헤어질 즈음에 나누어 줍니다. 무거운 것을 받을 때는 미안해집니다.
걷다가 눈이 시원한 곳에 앉아 수니가 내려온 커피를 마십니다. 커피를 받아먹는 컵을 내놓습니다. 종이컵을 가져간 나는 야단을 맞았습니다. 다음 모일 때 언니와 수니가 내 컵을 사 와서 나는 컵이 두 개나 되었습니다. 한 번은 언니 꺼, 한 번은 수니 꺼 그렇게 씁니다. 언제나 나는 복장도 불량, 준비도 불량입니다. 어떤 때는 가방 불량, 어떤 때는 신발 불량, 이번에는 장갑이 불량입니다.
보통 10킬로 이내를 걷습니다. 길을 걷고 밥집을 찾아 늦은 점심을 먹습니다. 어느 길을 걷든 우연히 들러 먹었던 음식이 맛이 없었던 적이 없습니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여서 그럴지도요. 커피를 마시며 뒤풀이를 합니다. 지난번 걸은 길에 기억나는 것을 그린 것을 보여주고 또 많은 이야기를 하고서야 헤어집니다.
양평 물소리 길을 두 번씩 돌고 다른 길도 갔습니다. 남산길을 두 번 돌고, 성북천 따라 청계천까지 가서 광장시장에서 빈대떡도 먹었습니다.
어느 비 오는 날, 운길산 근처를 걷고 있었습니다. 우산만한 토란밭을 지나니 낮은 지붕을 한 집 울타리에 부추꽃이 하얗게 피어 있었습니다. 부추꽃을 보니 돌아가신 어머님 집 작은 텃밭에도 부추꽃이 한창 피어났으리란 생각이 났습니다.
언제쯤이나 사는 일이 서툴지 않을까
내 삶의 옹이들도 불길을 타고
먼지처럼 날았으면 좋겠어
타오르는 것들은 허공에 올라 재를 남긴다
흰 재, 저 흰 재 부추밭에 뿌려야지
흰 부추꽃이 피어나면 목숨이 환해질까
흰 부추꽃 그 환한 환생
- 박남준 <흰 부추꽃으로> 부분
이 시도 떠올랐습니다. 환한 환생. 수니는 그 옆 담벼락에 올라와 핀 다알리아를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파란 우산을 쓴 그녀가 휴대폰을 올리고 다알리아의 ‘환한 환생’ 순간을 찍는 그 모습이 또한 ‘환한 환생’이어서 나는 그녀를 찍어줬습니다. 빗물에 촉촉 젖은 그것들을 보며 우리도 촉촉히 젖었습니다.
며칠 전에는 어린이 공원 숲길을 걸었습니다. 날이 더웠지만 바람이 살살 불어와 조금 있으니 땀은 사그라들었습니다. 언니가 웃으며 경고합니다.
“그늘로 가. 그늘이 없으면 용서하지 않을 거야.”
“응, 걱정 마요.”
나는 큰소리를 칩니다.
흙길은 사람이 없고 바람도 쉬고 있었습니다. 공연장 옆 숲길로 들어섰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흙길이 반반하게 나 있는 길, 나무들 사이로 시원한 공기가 불어옵니다. 작은 길로 뱅뱅 돌아서 소나무길을 거쳐 국기게양대를 가로지릅니다. 잔디밭에 토끼풀이 무성합니다.
“난 간지러워서 싫어.”
수니는 길로 갔고, 언니와 나는 이게 좋아, 하면서 푹신한 풀을 밟고 갑니다.
데크길에 올라섰더니 두 여인이 그늘이 좋은 평상에 잔치상을 벌여놓고 수다를 떨고 있었습니다. 그 자리가 명당인데 이미 빼앗겼으니 다른 곳으로 갑니다. 마루처럼 반질반질한 평상에 신발을 벗고 올라앉았습니다. 어릴 적 엉덩이 쳐들고 수건을 접어 마루를 닦던 생각이 났습니다. 서늘한 나뭇결이 몸으로 전해왔습니다. 바람이 솔솔 불어오는 나무 그늘에 앉으니 천국이었습니다. 오래된 떡갈나무가 펼친 잎들이 하늘을 가리고 사이로 파란 하늘이 언뜻언뜻 보였습니다.
한참을 앉아 수다도 떨고 땀을 식히고 다시 걸었습니다. 바람이 막힌 곳은 푹푹 쪘습니다. 햇살이 소리 없이 공격하는 화살처럼 쏟아져 내렸습니다. 습기를 가득 품은 공기가 훅 올라오며 비릿한 풀냄새가 얼굴을 덮었습니다. 개망초가 하얗게 지천으로 피어 있습니다. 이즈음 개망초가 예쁠 때입니다. 그것들은 무리 지어 있어야 더 예쁩니다. 부드러운 바람에 조금씩 흔들릴 때는 어쩐지 슬프기도 합니다. 유독 폐가에나 무덤에 흐드러지게 피는 개망초가 더 인상에 남아 그런지도 모릅니다.
더워져서 몸을 식혀야 했습니다. 찻길을 지나 바나나톡으로 갔습니다. 빵빵 틀어놓은 에어컨이 우리를 순식간에 냉동시켰습니다. 고르곤졸라와 감바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켜 먹으며 언니가 롤랑가로스 프랑스오픈을 보느라 잠을 설쳤다는 말을 했습니다. 잠을 설칠 정도로 테니스를 왜 좋아하는지 궁금했습니다.
“승부가 빨리 나잖아. 배구도 그렇고. 핑퐁핑퐁 핑! 하면 결정이 나잖아. 축구나 야구는 지루하게 기다려야 하고.”
“난 언니가 테니스를 했어서 그런 줄 알았어요.”
“하기도 했었지.”
언니가 테니스 이야기를 할 때는 말이 빨라지고 눈에서 빛이 납니다. 모두 그렇지요. 자신이 좋아하거나 잘 아는 것을 말할 때 얼굴에는 광채가 나게 마련입니다.
언젠가 여행지에서 저녁에 도착해 호텔방에 들어갔을 때 그가 티브이를 틀었습니다. 티브이에서는 테니스 선수들이 경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호주 오픈 중계방송이었습니다. 문득 호기심이 일었습니다. 경기장에는 구름 같은 관중이 모여 있었습니다. 남편이 중학교 때 테니스 선수로 활동했던 생각도 났습니다. 롤랑가로스 프랑스 오픈, 호주 오픈, 윔블던, 유에스 오픈, 이렇게 네 개 대회가 메이저 대회라는 것도, 조코비치와 나달도 그때 알았습니다.
결국 피자는 한 조각이 남았고, 수니는 새우를 두 마리 먹었고 나와 언니는 네 마리를 먹었습니다. 올리브유에 빠져 있던 마늘은 내가 다 건져먹었지요. 언니와 수니가 남긴 새우 꼬리가 접시에 꼬부라져 있었습니다. 나는 모두 씹어 먹었기 때문에 흔적이 없었지요.
“어린 조기를 다섯 마리를 구워서 그이랑 나눠 먹는데, 먹고 나면 머리가 붙은 척추 뼈만 남아요. 내가 지느러미 꼬리 다 씹어 먹거든.”
언니와 수니는 가시가 목에 걸리는 듯 기이한 얼굴이 되어 나를 져다 보았습니다.
걷기 모임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조금만 걸었더니 오후가 길었습니다. 이렇게 시원한 곳에 있으니 밖에 얼마나 햇살이 쏟아지는지 잊고 있었습니다. 방금 전 우리는 땀에 절어서 왔는데 몸이 보송보송해져서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다음 주는 너무 더우니 쉬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이 여름도 한 걸음씩 가을로 향해 갈 것입니다. 가을이 되면 퇴직한 나미언니가 합류해서 물-소-리-길 완전체로 걷게 됩니다. '물소리'에서 '물소리길'이 되는 거지요. 그러면 또 가을 길을 기분 좋게 걸으면서 우리 정도 쌓일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걷는 길마다 다정한 길이 될 테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