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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설자 Oct 10. 2022

지나온 어느 날에 물들어

오래된 시집

 

다시 책이 쌓인다.

비도 오고 미루던 정리를 한다. 이왕 책들을 꺼낸 김에 섞여 있던 시집을 따로 정리한다. 늘어놓은 시집을 보니 유명하다는 시인이 꽤 있다. 김수영, 윤동주, 기형도, 백석, 안도현, 박준, 나기철, 황병승, 허수경, 나태주, 실비아 플라스, 메리 올리버, 비스와바 쉼보르시카... 시집만 쌓아 놓으니 훨씬 읽기 편하다. 판형이 다양한 시집들을 크기별로 모아 차례대로 꽂는다. 매일 한 편이라도 읽으리라, 결심은 야무지다.


아주 오래된 시집도 있다. <에반젤린-이녹 아든>. 1993년 7월에 나온 초판본. 가격이 4천 원이다. ‘애절한 사랑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이녹 아든을 읽을 때 가슴을 후벼 팠던 기억이 나서 정리하다 말고 다시 읽는다.


혜원출판사. 1993년.


 93년이면 딸이 막 걸어 다닐 때다. 두 살 터울로 아들까지 낳고 그때 나는 좀 우울했다. 두 아이의 엄마로서 무거운 책임감이 있었고 학교에서는 좋은 선생님이 되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아이를 돌봐주시는 시어머니와 함께 살아야 하는 부담감도 있었다. 힘들었다. 아이가 막 세상으로 걸어 나갈 때, 나도 세상 밖으로 나가고 싶었던 걸까. 벗어나고 싶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고. 진눈깨비가 내리는 날, 그가 사 준 호피 털이 달린 반코트에 부츠를 신어 한껏 멋을 내고 광화문 교보에 가서 이 책을 샀던가.


개암나무 열매를 줍다가 이녹과 애니가 사랑을 속삭이는 모습을 멀리서 보는 필립의 가슴이 내게 오기도 했고. ‘개암나무’ 글자를 보기만 하면 숲 능선에 서 있는 필립이 떠올랐다. 특히 새장에서 깃털처럼 날아간 아기를 쓴 장면에 나는 울음이 터지고 말았다. 독자가 온전히 화자의 자리에 가게 하는 시가 좋은 시라고 이성복은 말하던데, 그때 나는 온전히 필립이나 애니의 자리에 있었다.



책장을 넘겨 에반젤린 프롤로그를 읽는다.


여기는 태고의 원시림

황혼 녘 아련할 때면

바람에 흔들리는 소나무가 푸른 이끼에 싸여

마치 슬픈 예언자의 목소리 지닌

옛 드루이드의 성직자처럼

가슴까지 턱수염 나풀거리는

은발의 하프 연주자처럼 서 있습니다.

바위 동굴에서 들려오는

바다의 드높고 장중한 소리는

이 태고의 원시림의 울부짖는 비명에 화답하는 것인가 


 아카디아 마을의 슬픈 사랑 이야기라는데. 여기 살던 사람들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랑프레 마을의 슬프디 슬픈 전설만이 남아 있다는데 기억나지 않는다. 아카디아 마이다스 만에 닿기 전에 28년 전 기억에 가 닿는다.


다음 장을 넘기니 첫 연이 시작되는 여백에 연필로 쓴 메모가 있다.


아빠는 사이판으로 연수를 떠나고

아가는 열이 나 사과처럼 빨갛다.

숨 쉬는 게 가쁘더니 이제 좀 괜찮다.

잘 수 없어 열이 내릴 때까지

기다리며 에반젤린을 읽는다.

천지가 고요한데 아가의

숨소리만 들린다.

(94. 11. 25.) 

    

그 메모를 보니 아이를 키우던 그때로 순식간에 이동하고 아가들 모습이 소환된다. 시어머니와 미아리 작은 집에 살던 때로. 그때는 몰랐지만 아이가 아파도 크게 당황하지 않은 것은 어머니가 옆방에 자고 계셨기 때문일 거다.  


남편은 일주일인가 집을 비웠다.

아기들과 남은 우리는 맨숭맨숭했다.

어머니와 별로 좋은 때는 아니었다. 팔로 밥그릇을 그러안고 식사하는 어머니를 안 보려고 고개를 숙이고 먹기도 했다. 아기들에게만 말을 걸었다. 퇴근하고도 곧장 오지 않고 백화점으로 거리로 쏘다니다가 늦게야 오곤 했다.


며느리가 없는 동안 어린 아가들 둘을 돌보느라 힘들고 고생스러운 것은 생각도 않고 그렇게 나는 못되게 굴었다. 그때 어머니는 지금의 나보다 더 어린 나이였다. 내가 그 나이를 지나고 보니 어머니가 어떤 마음이었을지 이제서 이해가 된다. (지금은 하늘에 계신 어머님. 아이들 곱게 키워주시느라 고생하셨어요. 고맙습니다. 그때 이유 없이 미워해서 죄송해요.)


아이들이 잠들고 남편이 없는 그 밤,

잠이 오지 않아 책상을 정리하다가 문득 눈에 들어온 책 구절.

 ‘사랑만이 용서할 수 있다’

못되게 굴었던 내가 못나보였다. 좀 울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음을 조금 내려놓았다.

그런 기억들이 밀려왔다.



아기가 아프면 조바심으로

가슴이 온통 붉어지던 날들

현실에 매어 어쩌지 못했던 날들

책 정리하다 오래된 시집을 읽으며 나는 또 지나온 어느 날에 물들어 눈시울이 붉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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