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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설자 Nov 17. 2023

유쾌한 병

책을 대하는 습관


 중병에 걸려 있다. 열도 없고 아프지 않다. 종양이 내 신체를 잠식하는 것도 아니지만 정말 고치기 힘든 병을 앓고 있다. 아주 오래전부터 스스로 걸린 병이다.  


 알라딘에서 플레티늄 고객이니 쿠폰을 발행해 준다는 ‘아름다운 문자’를 보내온다. 날마다 온라인 서점을 구경하다 장바구니에 새로 나온 책을 담아 놓는다. 엊그제 온 새 책을 다 읽지 못했는데 근사한 서평을 보자마자 또 유혹을 못 이겨 사들이고 만다. 이상하게 책을 사는 일은 아깝지 않다.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은 집중이 되지 않는다. 빌려 읽은 책은 느낌의 강도가 다르다. 버스를 타고 휙 지나가는 차창 밖 모습 같다. 어디에 표지판이 있는지, 코스모스가 피어 있는지, 휙휙 지나가는 가로수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지나가듯, 책을 읽고 나면 모두 흩어지고 만다.


 반면 내 책으로 읽을 때는 천천히 걸어가는 것과 같다. 흙을 밟는 순간의 향기와 발바닥에 닿은 자박거리는 돌멩이의 느낌과 흔들리는 꽃잎을 스치는 바람까지 내 안으로 스며들 듯, 책이 내게로 고스란히 건너온다.



<책 산책가>표지   카르스텐 헨 지음(나는 이 책이 좋다.)

 

책을 펼치면 마음을 끌어당기는 문장에 밑줄을 긋고 그 순간 떠오르는 생각을 적는다. 첨지에 메모를 한 적도 있는데 책에 쓰는 것만 못하다. 책의 여백에 써야 제 맛이다. 그래야 그때 가진 생각이 마구 걸어 나온다. 진정한 독서의 기쁨을 느끼는 순간이기도 하다. 요즘 읽는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페이지마다 밑줄이다. 밑줄을 긋고 메모하는 오랜 습관 탓에 결국 책을 사야만 한다.


 일본 근대 작가들의 서재에 관해 쓴 <작가의 서재>를 읽다 보면 글을 쓰는 사람들은 비슷한 경향이 있음을 알게 된다. 바로 책 욕심이다. 시마무라 호게쓰가 쓴 ‘탁자 위’라는 글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그가 쓰는 탁자는 “꽤 커다란 편인데도 45센티미터 정도 말고는 갖가지 책과 원고로 가득 차” 있다면서 “한 줄로 쌓았던 책이 두 줄로, 두 줄은 다시 세 줄로 늘어나더니 사방에서 주인을 포위하기에 이르렀다.”라고 말한다.  


 지금 내 작은 책상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아 읽다가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내 탁자 위에도 당장 읽을 것 같아서, 글 쓰다 꼭 필요한 것 같아서, 이런저런 이유로 책들이 탁자를 가득 점령하고 있다. 앞부분을 읽고 언제 읽을지 모르는 <인간의 조건> 같은 벽돌책, 밤늦게 읽으면 제맛인 센시티브 한 <농담과 그림자> 같은 책들, 조용한 아침에 읽을 만한 인문학 서적들, 소설책들, 몇 권의 시집들, 시어 사전까지 가져다 놓았다. 거기다 글쓰기 초고 노트, 다이어리, 연필꽂이가 공간 없이 늘어서 있다. 서재에 두고 필요할 때마다 가져와도 되련만 한 번 기어 나온 책은 다시 제자리로 들어갈 줄을 모른다.


 ‘탁자 위’에는 이런 문장도 있다. “게 중에는 이미 용무를 마치고 머리 터진 개구리처럼 죽은 듯이 뻗어버린 녀석이 있는가 하면, 다음 무슨 요일에 다시 볼일이 있어 그날을 기다리는 녀석도 있고, 뽑힌 채 한 번도 펼쳐진 적 없어 기가 죽은 녀석마저” 있단다. 그 부분을 읽다 말고 “나도 그래요. 책들이 서로 저를 골라달라고 조르고 있네요.”라고 적어 놓는다.


 그렇게 쓰는 순간 나는 조용히 작가 옆에 가까이 다가가서 귓속말을 하는 기분이다. 시마무라 호게쓰가 글을 쓰는 1910년대로 날아가 글을 쓰고 있는 작가의 책상 옆에서 원고지에 붓으로 써 내려가는 소리를 들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만 같다. 그렇게 책을 읽으면 내용을 읽는다기보다 작가의 공간과 글 속의 기운을 함께 누리게 된다. 작가의 세계와 함께 한 그 순간의 온도가 느껴진다. 시간이 흘러 다시 읽어도 당시의 메모는 처음 책을 읽을 때 분위기로 다시 돌아가게 만드는 마술을 부린다. 이런 식으로 나는 작가와 대화를 한다. 빌려온 책은 그런 대화를 할 수가 없다. 그러니 내 책이 아니면 안 된다. 이쯤이면 중병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참 고질적인 병이다.  


 헌책방 작가와 가까워지면서 그곳에 들를 때마다 책을 사들고 온다. 사고 싶은 목록을 적어가 가져오기도 하지만 대개는 주인장의 추천으로 가져오는 책이 많다. 게다가 사흘이 멀다 하고 주문한 새 책이 온다. 처음에는 한두 권만 꺼내 읽는다. 그러다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늘어나 탁자 위에는 두 줄 세 줄로 심지어 소파 옆에도 사정없이 쌓인다. 얼굴을 가릴 정도가 되어야 정리를 한다. 모두 치우고 당장 읽을 것들만 내놓는다. 그러나 새로 주문한 책이 다시 더해지면서 책 높이가 높아져만 간다. 한 책을 다 읽기도 전에 다른 책이 읽고 싶어 다른 책을 고르고 읽는다. 그러는 사이 다른 책의 맥락은 잃어버린다. 한 권을 내리 끝까지 집중하고 읽어도 돌아서면 잊어버리는데 여러 권의 책이야 말해 무엇하리. 하지만 이 책 저 책을 골라 읽는 재미에 푹 빠진다.


 유독 책만큼은 욕심이 지나칠 정도다. 돈을 들여야만 하는 병. 한없이 집안의 공간을 점령하는 병. 골치 아픈 병이지만 낫고 싶지 않다. 아니 오히려 그 병을 즐긴다. 그러기에 ‘행복을 부르는 병’이라고 이름 짓는다. 참 유쾌한 병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 병을 함께 앓았으면 좋으련만. 앞으로도 나는 이 중병에서 벗어날 생각이 없다.


책을 눈앞에 잔뜩 세워 두고 한 권을 뽑아 첫 장을 펼쳐 읽을 때,

나는 행복하다.


(2023년 10월 광진문학 제25호)



짧은 가을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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