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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설자 Nov 09. 2023

나날들

느리고 단조로운 시간들

       

 장마가 지나고 더위가 온몸을 가두는 끈적한 날들이다. 한낮의 열기가 가라앉은 시간. 밖으로 나서보지만 계절의 흐름은 더디기만 하다.

 

늘 가는 공원에는 여름내 한껏 몸을 키운 무성한 풀이 잘리고 양탄자가 깔린 듯 시원하게 뚫려 있다. 군데군데 모아놓은 풀 무더기에서 풀냄새가 뿜어져 나온다. 살아 있을 때 마지막으로 내는 그 비릿한 냄새. 풀들이 베어질 때, 서로에게 경고하느라 풀냄새를 내보내는 거라던데 정말 그럴까. 그 마지막 향기를 가득 가슴에 담으며 한 발 한 발 내딛는다.


 몸이 나아가는 동안 땅 위에 고여 있던 습기는 가만가만 나를 위해 비켜준다. 혼자 걷는 고독의 시간이, 느린 흐름이 좋다. 문득 참새들이 느티나무에서 날갯짓하며 지저귀는 소리가 하늘로 퍼진다. 그들의 말을 알아들으려 귀 기울여본다. 나 혼자만이 아니구나.


 떠들썩함도 없이 자연은 조금씩 변해 간다. 벌써 노란 잎들이 보인다. 잎을 들쳐보니 설익은 산수유 열매가 알알이 매달려 있다. 푸릇한 눈망울을 가만히 만져본다. 단단하다. 그들이 견뎌온 뜨거운 흔적이 손끝에 전해온다. 여름의 시간을 치열하게 지나왔노라고 온몸으로 반짝이는 대견한 대답. 오래지 않아 투명한 햇살을 담은 새콤한 산수유가 될 것이다. 힘겨운 시간을 견뎌내어야 맑은 색을 담은 결정이 된다는 것을 자연은 이미 터득하고 있구나.  


제주의 여뀌

 

 늘 누군가 차지하고 있던 그네의자가 비어 있다. 등을 기대고 발을 뻗어 뒤로 한껏 밀어 올린다. 어느 순간 툭 풀어놓자 그네는 스스로 도돌이 운동을 시작한다. 다리를 늘어뜨리고 흔들리는 의자에 몸을 맡긴다. 다가오는 바람이 얼굴을 스치며 어디서 날아온 여름 끝물 향기를 뺨에 묻히고 간다. 밀려가는 바람이 등을 다독인다. 강물도, 풍경도, 하늘도 그네 따라오고 간다. 천천히 오르내리는 세상에 몸을 맡긴 채 눈을 감는다. 편안하다. 그저 하나의 사물이 된 것만 같다.


 아주 오래전 아기였을 때 작은 아기 구덕에 누워 흔들리던 시절에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그런 안온한 세상을 지나온 것이리라. 내게서 떠나간 시간들. 때로는 느슨하고 때로는 끊어질 듯 팽팽한 삶의 순간들이 이어졌다. 삶에 매달려 달려가던 그네에서 내려오고서야 먼 도시 강 위로 흐르는 노을을 따라 나도 흘러갔다. 비로소 세상이 조금씩 느려지기 시작했다.


 그네가 서서히 멈춘다. 그때쯤, 읽다가 덮고 온 프랑수와즈 사강의 시간을 함께 느낀다.      


 “달그락거리는 자갈길을 산책하거나 먼지가 쌓인 벤치에 앉아 있을 수 있는 시간... 나는 그 느리고 단조로운 시간을 좋아했다. 기지개를 켜고, 하품을 하고, 나무가 몇 그루인지 세어보면서 조금은 무미건조한 고독의 맛을 느꼈다... 센강이 노란빛 파란빛으로 반짝였다. 여섯 시였고, 해는 막 강물을 버리고 창백한 하늘 깊숙한 곳에 있었다. 나는 계단을 내려가 둑길을 걷기 시작했다. 아무도 없었다. 난간 위에 걸터앉아 다리를 흔들었다. 완벽한 행복이었다.”     


 센강 어디에 앉아 평온한 시간 속에 다리를 흔드는 사강을 그려 본다. 몇 해 전 가본 센강의 노을이 떠온다. 금세 어둠이 밀려와 화려한 에펠탑의 불빛이 노랗게 강물을 덮었고, 우리는 반짝이는 세상에 환호하며 좁은 강을 건넜다. 센강은 그 이름에 어울리려면 폭이 좁은 강이어야만 한다. 한강은 그 이름에 어울리려면 폭이 넓은 강이어야 하고.


  한낮의 햇빛이 데워 놓은 돌 위에 앉아 잔잔한 강물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저물어가는 기운이 물결 위로 내려앉으며 “막 강물을 버리고 창백한 하늘 깊숙한 곳”으로 가려는 사강의 시간이 다가온다.  


 아직 남은 햇살에 수천만의 반짝거림으로 흔들리는 강물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오늘을 살아가는 마음들이 가득 차오른다. 강물을 보기만 하여도 이상한 화학적 변화가  안에서 일어난다. 누군가에게 기우는 다정한 하루가 되었을까. 차오르던 마음은 다시 가라앉는다. 구멍  가슴도 있지만, 눈물이 고일만큼  그만큼만 쓸쓸해야지. 그저 저녁 강바람  줄기에 하루를 실어보는 이름 없는 나의 시간이 지나간다.  


 세상의 날들은 바쁘고, 숨차고, 어지러운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휩쓸려간다. 그 귀퉁이 어딘가에서 아주 작은 나의 단조로운 나날들이 그렇게 흘러간다.    

       




( 2023. 11. 문학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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