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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설자 Nov 05. 2023

시 쓰는 운전기사

<패터슨>을 보고

        

참 괜찮은 영화 한 편. 짐 자무쉬 감독의 조용한 영화다.


패터슨은 패터슨에 사는 버스 운전기사다. 영화는 패터슨 부부의 일상을 쫓아가며 보여준다. 그는 날마다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 똑같은 길로 출퇴근을 하고 똑같은 경로로 운전을 한다. 퇴근하고 아내와 저녁을 먹고 강아지 마빈을 데리고 산책한다. 산책길에 들르는 바에서 맥주 한잔을 마시며 가게 주인과 소소한 이야기를 나눈다.


그의 아내는 사랑스러운 여인이다. 변화를 꿈꾸며 새로 커튼을 달고 커튼과 같은 옷을 입고 물감을 옷에 칠하며 창조의 기쁨을 누린다. 아침마다 꿈을  이야기를 남편에게 들려준다. 그림이 그려진 컵케이크 도시락을 만들어주고 날마다 다른 사진이 들어 있다. 그녀는 패터슨이 읽어주는 시를  빠지게 기울여 듣는다. 사랑은 그렇게 들어주는 거다. 온마음으로 들어주는 거다.



영화 <패터슨> 스틸컷



“냉장고에서 자두를 먹었다오....”


어? 알고 있는 '자두' 시가 나와 반갑다.       


"냉장고에 있던

자두를

내가 먹어버렸다오     

아마 당신이

아침 식사 때

남겨둔 것일 텐데

용서해요, 한데

아주 맛있었소     

얼마나 달고

시원하던지"

     

잘 알려진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의 시 <다름 아니라> 전문이다. 크고 물기가 많은 시원하고 새콤한 자두를 막 지금 깨물고 먹는 기분이다.


그는 작은 노트에 시를 쓴다. 식탁에 뒹구는 성냥을 보고도, 버스에 타는 사람들의 이야기나, 일상의 작은 차이를 발견하고는 그것을 미세하게 들여다본 것들이 시의 소재가 된다. 예민한 눈으로 반복되는 삶을 찬찬히 바라보며 시를 쓴다.


함께 사는 강아지 마빈은 인간의 언어로 말만 하지 않았지  명의 배우다. 가령 패터슨과 로라가 다정한 키스를 하거나 사랑스러운 행동을  때는 주름 많은 노인처럼 헛기침을 한다. 둘이 대화를 하려면 자기도 끼어야 하는 것처럼 의자에 올라앉아 귀를 쫑긋 연다. 뭔가 자기가 끼어야  곳처럼 으르렁 거리거나 소리를 낸다. 마빈의 연기가 특출나다. 그를 캐릭터로 둔갑시킨 감독의 재치가 놀랍다.


귀여운 마빈 -영화 <패터슨> 스틸컷



그런데 이 똑똑한 마빈이 사고를 치고 만다. 아내에게 시를 읽어주려고 잠깐 가지고 올라와 소파에 두었던 비밀 노트를 부부가 외출한 사이 갈가리 찢어놓는다. 그동안 써 놓은 시가 찢겨 알아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조각조각 뒹구는 그것을 줍는 로라의 안타까움이 그대로 전해져 온다. 로라가 딱 한 번 마빈에게 화를 낸 것은 그때다.


 내 노트북에 글들이 사라진다면? 정말 견딜 수 없을 것이다. 헤밍웨이가 2년 간 쓴 소설의 원고가 담긴 가방을 기차가 멈춘 사이 아내에게 맡겼는데 잃어버리고 만다. 쓰다가 만 단 한 편의 글도 어쩌다 사라졌을 때 허탈한데 2년 동안 쓴 원고가방이 사라졌으니 얼마나 참담할까. 그는 실망과 좌절과 분노로 글을 쓸 의욕을 잃어버린다. 순간순간 사라진 원고가 떠올라 얼마나 화가 날까. 그 모습을 보는 아내는 어땠을까.  


라울 뒤피도 베니스를 여행하며 그린 수많은 수채화들을 (전운이 감돌자) 미국으로 옮기다가 배가 침몰하고 만다. 수많은 작품이 통째로 대서양 어딘가 가라앉고 말았다. 사라진 작품들에 대한 아쉬움은 쉽게 삭일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헤밍웨이도 그 후에 많은 글을 썼고, 라울도 수많은 작품을 그렸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릴 때도 사람에게는 용기가 나오는 법이다. 글을 쓰지 않고는 못 배기는, 그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힘이 숨어 있는 것이다.


패터슨은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 같았다. 패터슨이 위태로웠다. 그 공허해진 마음이 그대로 전해진다. 그는 시상을 떠올리곤 하던 공원으로 간다. 거기서 패터슨에 여행 온 한 일본인 시인을 만난다. 그는 패터슨에게 빈 노트를 준다. 패터슨이 원고가 사라진 것을 알고나 있듯이.


“비어 있는 노트는 가장 많은 가능성이 있지요.”


 패터슨은 시인의 준 노트를 천천히 펼치다가 주머니에서 펜을 꺼낸다. 그때서야 나는 숨이 쉬어진다. 그 노트에 시가 다시 차오르는 그림이 그려진다. 이제 그의 무너진 가슴이 일어날 것 같아 마음이 놓인다. 누군가의 작은 선행은 누군가를 또 일어나게 한다.


패터슨은 다시 비밀 노트를 꺼낸다. -영화 <패터슨> 스틸컷




실제로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는 패터슨 시에 오래 살았다고 한다. 그의 시를 읽고 싶어 <패터슨>을 주문한다. (그런데 주문한 <패터슨>에는 '다름 아니라'가 없었다.)




우리는 모두 빈 노트인지도 모른다.

그 빈 노트에는 가장 많은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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