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를 마시며
나는 맥주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다만 분위기를 맞추려 마시는 정도랄까.
연애시절 데이트할 때 처음 맥주를 마셨나 보다. 작은 버드와이저 병목을 부딪치며 마시곤 했었다. 쓰면서도 부드러운 맛. 맥주의 본질적인 맛과 연인과 함께여서 오는 설레는 맛. 내게 맥주는 그 정도였다.
지난번 여행에서, 독일과 동유럽 소도시들을 다니면서 맥주를 자주 마셨다. 맥주의 맛을 구별할 정도의 경지는 아니지만 조금씩 차이는 느낄 수 있었다. 맥주를 마시는 나름대로 원칙까지 만들었다.
‘손잡이가 달린 두꺼운 컵보다 오목 볼록한 얇은 유리잔이 좋겠어. 캐시미어 카디건 정도는 입어야 할 을씨년스러운 날씨면 더욱 좋겠어.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오는 사람과 같이 마신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
찰리 채플린이 그려진 까를로비 바리의 식당에서도 맥주를 주문했다. 초여름이었지만 비가 내리는 변덕스러운 동유럽 날씨는 두꺼운 스카프를 해도 어깨를 움츠리게 했다. 그런데 맥주 맛은 오히려 따듯하게 느껴졌다. 나는 다시 한번 그 맛을 느끼려 맥주를 들이켰다. 하지만 첫맛과는 달랐다. 마실수록 평범해지면서 쓴맛이 더해졌다. 처음이 주는 매력을 다음은 쫓아 올 수가 없는 것인가 보다. 그렇게 익숙해지는 것이겠지. 인생도 그렇다. 행복한 기억은 짧고 따라오는 나날들은 쓰고 긴 것처럼.
체코 플젠. 바르톨로메오 대성당 광장에는 맥주축제를 준비하고 있었다. 무대, 테이블, 맥주 홍보물이 가득한 광장 한 자리에 앉아 축제를 상상해 보았다. 커다란 맥주잔을 들고 맥주를 즐기는 시끌벅적한 웃음소리와 맥주 냄새가 코끝을 스치는 것 같았다. 같이 즐기면 좋으련만. 그러나 우리는 일정 때문에 이동해야 했다.
대신 가는 곳마다 축제처럼 맥주를 마시기로 했다. 플젠에서 저녁을 먹을 때. 나는 필스너 우르켈을 주문했다. 캐스크에서 방금 뽑아온 맥주가 미끈한 와인 잔에 담겨 있었다. 흰 구름 아래 노을이 내린 맥주. 금세 잔에는 작은 물방울이 맺혔다.
나는 잔을 들어 올렸다. 물방울 스팽글이 반짝이는 드레스에 풍성한 흰 깃털 모자를 쓴 여인 같은. 차갑고 싱싱한 맥주의 기운이 손끝을 타고 전해왔다. 눈으로 마시고, 손으로 마시고.
“행복한 여행이길!”
누군가 치어스를 했다.
천천히 잔을 기울였다. 거품이 터지고 사라지면서 입술을 간지럽혔다. 풍성한 거품과 함께 맥주가 입술에 닿을 때 달콤한 행복감. 첫 키스의 맛이 그랬을까. 입술로 마시는 맥주의 관능. 혀끝에서 느껴지는 쌉싸름한 시원함. 목으로 넘어가는 보리 냄새. 여태까지 마셨던 모든 맥주의 첫 잔의 맛과는 달랐다.
나는 점점 맥주가 좋아지고 있었다. 아마도 오랜만에 얻은 자유와 낯선 여행지에서의 분위기가 더해져서 더욱 깊은 맛을 느꼈으리라. 모든 처음이 그처럼 황홀한 것이라면 두렵고 떨리는 어떤 모험도 해 볼 용기가 생길 것 같았다.
그 날 우리와 함께 식사한 조용한 부부는 부인이 시인이라고 했다. 한 모금을 마시고 그녀와 나는 약속이라도 한 듯 마주 보았다.
“「첫 맥주 한 모금, 그리고 다른 잔잔한 기쁨들」 읽으셨죠?”
“아, 네 필립…?”
그녀가 웃으며 갸우뚱했다.
“들뢸름요.”
들뜬 내 목소리. 우리끼리 통하는 문학의 기운. 그리고 <첫 맥주 한 모금>.
중요한 것은 딱 한잔이다.…… 맥주 첫 잔이 주는 기쁨은 하나의 문장처럼 모두 기록된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가장 좋은 기쁨은 벌써 맛보아 버렸다는 것을, …… 지금 막 이루었다가 또 지금 막 사라져 버린 기적을 손에 넣고 싶어 한다.…… 이제 맥주를 마실수록 기쁨은 더욱더 줄어든다. 그것은 쓰라린 행복이다. 우리는 첫 잔을 잊기 위해서 마시는 것이다.
그는 ‘첫 잔을 잊기 위해서’ 마시지만, 나는 ‘첫 잔의 맛을 찾으려고’ 마시고 또 마셨다.
가장 좋은 기쁨. 그는 ‘벌써 맛보아 버렸다’고 아쉬워한다. 나도 그럴까. 가장 좋은 기쁨은 이미 다 맛보아 버린 것일까. 달콤한 신혼시절, 꿈이 곧 이루어질 것만 같았던 여고 시절. 노을이 짙은 가을날 아버지 손에 들려 있던 머루 다래의 진한 향기가 코끝을 어지럽히던 어린 시절.
지나가버린 기쁨을 나는 맥주 첫 잔에서 찾으려 하는지도 모른다.
아니다. 기적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직도 내겐 맛보아야 할 수많은 기쁨들이 있기 때문이다. 나짐 히크메트의 시처럼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이다. 모든 남아 있는 날들은 내게 첫 잔이다.
남아 있는 그 모든 첫 잔에 건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