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여운 나의 제자
산책하다 멀리 나가게 되었다. 강 따라 아래로 아래로 내려간다. 강물은 얼었다 풀리길 반복하느라 가에는 얼음이 아직도 떠 있고 햇빛을 받은 물결이 수만의 비즈처럼 반짝인다. 한두 송이 피었던 개나리가 오그라들어 추위에 떨고 있다.
강변 따라 나무 아래로 흙길이 길게 나 있다. 눈이 녹아 질척이는 곳을 피해 잔디를 밟으며 흙길만 골라 걷는다. 두 시간 넘게 걷다 보니 익숙한 어느 동네 근처에 와 있다. 내가 근무했던 학교가 있던 동네다. 문득 10년 전 그곳에서 가르친 한 제자가 생각난다.
오후 수업은 음악시간이다. 노래에 맞게 가사를 고쳐 그에 맞게 몸으로 움직여보는 모둠활동을 하느라 아이들은 교실 구석과 복도에 흩어져 소란스럽게 의논하고 있다.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느라 목소리를 높이는가 하면 장난기가 발동하여 돌아다니는 아이들도 있다. 서로 의논하면서 상대의 의견을 존중하고 다른 반에게 방해되지 않도록 배려하는 성숙한 자세를 열 살 어린이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그럴 땐 포기해야 한다.
모둠마다 돌아다니며 잘 해결하고 있나 살피는데 휴대폰 진동이 바쁘게 울린다. 집 전화다. 웬만하면 받지 않지만 예감이 이상하다. 아들이 했을 터다. 수시로 넣은 두 학교는 최저 등급에서 밀리고 마지막 하나 남은 학교 결과를 목놓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마지막 그 학교가 아니면 치열한 정시 전쟁에 돌입해야 하는 상황이다. 혹시? 하는 생각에 전화를 받는다.
"엄마, 방금 떴어! 합격 먹었어!"
순간, 나도 모르게 교사용 의자에 주저앉는다. 눈물이 왈칵 솟는다. 교실인 것도 잊고 그만 목놓아 통곡하고 만다. 그동안의 일들이 스쳐 지나간다. 새벽 세시 반에 일어나 영동대교를 넘어 봉은사에 가서 새벽 기도를 드리고, 집으로 넘어와 아들을 깨워 밥을 먹이고 다시 영동대교를 넘어 대치동 재수학원으로 실어다 준다. 차 안에 앉아 있는 아들이 그저 부처이려니 하면서 마음을 가라앉혔다. 다시 다리를 넘어 집으로 와 바삐 출근을 하던 지난 1년의 그 힘겨운 나날들이 머릿속을 훑고 지나가며 눈물로 흘러내린다.
아이들이 몰려와 모두 놀란 토끼들처럼 나를 올려다본다. 복도에서 시끄럽게 활동하던 아이들도 달려온다. 책상 주변에 아이들이 가득하다. 엉엉 우는 선생님을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더러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본다.
그때 민이가 달려와 소리 지른다. 민이는 나를 힘들게 한 아이지만 상황 판단이 빠르고 공감력도 우수한 남학생이다.
"선생님, 왜 울어요? 무슨 일이에요?"
나는 벌게진 얼굴로 간신히 말한다.
"응, 선생님 아들이 합격이래!"
"수능 합격했어요?"
"응???? 그래, 수능! 합격했어! 흐흐흐"
아이들은 모두 손뼉을 치고 자기 일처럼 좋아서 방방 뛴다. 눈물이 채 사그라들지 않은 채, 좋아 날뛰는 아이들을 행복한 무지개너머로 바라본다.
세월은 흘러 '수능 합격'한 아들은 대학 졸업 후 취직도 하고 결혼도 했다.
내가 근무했던 학교가 있는 그 동네를 지나려니 아이들의 밝은 얼굴이 떠오른다. 그 아이들, 그들도 '수능에 합격'하고 지금은 대학생이 되고, 군에 갔으려나. 그날 내 책상에 몰려와 웅성거리며 나를 걱정하던 그 초롱한 눈망울들이 마치 내 앞에 있는 것만 같다. 내 손을 잡고 자기들 일처럼 함께 기뻐하던 그 둥그런 시간으로 돌아간 듯 눈시울이 촉촉해진다.
그들 앞에도 밝은 미래가 펼쳐지리란 믿음이 피어나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