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려준 꽃다발을 들고
어느 날, 퇴근하고 집에 왔더니 화장대 위에 꽃병 가득 한 무더기 꽃이 꽂혀 있었다. 향긋한 프리지어 꽃향기가 방안에 가득했다. 꽃병 옆에 아들이 쓴 작은 쪽지가 붙어있었다. 전날 저녁, 아들은 뭔가를 꺼내다 내가 아끼는 넓은 디너 접시를 깨뜨리고 말았다. 다음날 아들은 그 일을 여자 친구인 서희에게 이야기했고, 서희는 엄마가 좋아하는 꽃이 뭐냐고 물었단다. 아직 봄이 먼 스산한 날, 화장대에 노란 봄을 미리 가져다 놓은 걸 보니 아끼던 거라고 화를 냈던 일이 슬그머니 미안해졌다. 옷도 갈아입지 않고 한참을 화장대 앞에 서서 기분 좋은 시간을 보냈다.
나는 수선화 비슷한 향을 가진 프리지어 꽃을 참 좋아했다. 울적해질 때면 꽃집에 들러 노란 프리지아를 가득 샀다. 그것을 들고 오면서 이 꽃이 시들면 다시 꽃을 사리라 했다. 거실에 꽂아 추사가 중국에서 들여온 수선화를 완상 하듯 바라보곤 했다. 꽃값이 비싸진 때는 '나를 위해 그 정도는 할 수 있어' 위안하면서. 아주 가끔 남편이 술 한잔하고 올 때는 역전에서 한 묶음 사들고 오기도 했다.
가끔 서희도 집에 올 때마다 꽃을 사 왔다. 봄에는 프리지어를 가을에는 국화를. 연분홍 작약을 한 무더기 사 오기도 했다. 그렇게 여러 계절을 보내며 꽃향기 같은 정이 우리들에게 쌓였다. 그들은 그 꽃다발만큼이나 사랑을 꽃피우고 부부로 연을 맺었다.
얼마 전 내 생일이라 가족이 모여 간단한 외식을 하기로 했다. 이제 며느리가 된 서희는 선물과 풍성한 꽃을 화병에 담아 들고 왔다. 프리지어에 장미와 금어초를 섞은 화려한 꽃병이다. 꽃이 남아 몇 송이 골라 친구네 가게에도 가져다주었다. 예쁘게 손질하여 가게 진열장에 꽂아 놓은 것을 보니 흐뭇했다.
꽃다발을 볼 때마다 고등학교 졸업식이 있던 날이 떠오른다. 우리 학교는 미션계 학교라서 성당에서 마지막 여고 시절 한 순간을 보내고 있었다. 미사를 겸한 엄숙한 졸업식이었지만 나는 좀 외로웠다. 엄마가 갑자기 얼굴이 붓고 아파서 오지 못한다는 연락을 받은 터였다. 오빠는 군에 가 있고, 동생은 어리고... 못 온 가족을 원망할 수 없었다. 나를 위해 오늘 아무도 오지 않는다는 사실만 온통 머릿속에 꽉 차 있었다. 성적이 좋아 상을 받으며 박수갈채를 받는 것도 아니고 좋은 대학에 합격해 졸업하고 육지로 화려하게 날아가는 것도 아니고 그저 졸업생 350명 중에 한 사람으로 이름을 올리고 졸업장 한 장 받는 날에 불과했다.
졸업식이 끝나고 성당 밖으로 나오니 화창한 봄날 같았다. 마리아상 위로도 녹나무 위에도 눈부신 햇살이 내리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가족들이 꽃을 전해주며 축하받는 친구들로 북적였다. 3년 동안 나는 각광받는 학생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졸업 때만이라도 누군가의 축하는 받고 싶었다. 가족이 못 오는 것을 이해하려고 했지만 마음이 서늘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마도 사랑받지 못했다는 서글픔이 더 컸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민애도 정숙이도 꽃다발을 들고 사진을 찍고 있었다. 가족들이 모두 와서 몇 개의 꽃다발을 받은 민애가 사진을 같이 찍자면서 어물쩍 서 있는 내게로 왔다. 빈 손인 나를 보고 자기가 받은 꽃다발 하나를 내게 건네주었다. 그것을 들고 친구들과 교복을 입은 마지막 사진을 찍었다. 나는 눈물이 나려는 것을 억지로 참으려 했지만 목울대가 가득해지면서 자꾸 눈앞이 흐려지려 했다.
뿌연 그 안개 너머로 지나온 3년 자취 생활이 내 앞을 지나갔다. 주말마다 집으로 용돈을 받으러 가면 부모님은 일손을 얻고 싶어 했다. 나는 나대로 월요일마다 보는 시험에 조급해졌다. 아이들이 주말에 놀까 봐 월요일마다 시험을 봤겠지만 나 같은 아이도 있는 것을 학교는 배려하지 않았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니면서 마음만 바빠진 나는 용돈만 받고 일요일 오전이면 시내로 건너오고 싶어 조바심이 났다. 하지만 바쁜 부모님을 보며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고 졸아드는 마음으로 엄마 눈치만 보곤 했다.
언젠가 엄마가 풋고추를 따 서귀포 시장에 앉아 낱개로 쌓아 팔고 온 돈이라면서 그날은 평소보다 이천 원 더 건네주셨다. 그것을 받으면서 마음이 무너졌다. 산방산이 보이는 차부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나는 알 수 없는 분노 같은 것이 치밀어 올랐다. 화가 난 마음인 것도 같고 슬픈 마음인 것도 같은. 자취방으로 돌아와 열심히 공부하여 나중에 돈을 벌면 부모님 호강시켜 드리겠노라고 편지도 썼던 것 같다.
일주일에 오천 원은 언제나 부족했다. 선명회 어린이 합창단 공연이 시민회관에서 열릴 때, 그것을 꼭 보고 싶어 표를 사는데 일주일 용돈을 다 주어야 했으니까. 방이 너무 추운 날은 이불속에 밥통을 놓으면 온기가 조금 돌았다. 그 온기로 잠이 들 때까지 밥통을 껴안고 자야 하는 밤도 있었다. 집에 가지 못한 주에는 용돈이 부족하여 할 수 없이 라면을 먹기도 했는데 (나는 라면이 진짜 싫었다. 자취 생활 5년 동안 라면을 먹은 날은 몇 번 안 된다.) 감자를 썰어놓고 끓여 먹었다.
그런 기억들이 그 짧은 순간 흘러갔다. 그까짓 꽃다발! 그런 시시한 합리화를 하면서 카메라 앵글을 바라봤다. 별로 기쁜 일도 없고 그저 잘난 아이들 틈에서 찌그러진 생활을 했던 3년이었다.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가족이 원하는 교대 입학이 결정되었기에 제주를 떠나 드넓은 세상으로 나가고 싶은 꿈은 물거품이 되었다. 다시 섬에 있는 학교를 다녀야 하고, 발령이 나면 다시 섬에서 선생으로 일해야 하는 것이 참 싫었다. 슬픈 마음은 감출 수 있었으나 그날따라 왜 그리 날은 화창한지. 성당 앞에 화사하게 내리던 햇살아래 곧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초라한 모습으로 서 있던 시간은 감출 수 없었다.
서희가 사 온 꽃다발이 아직도 향기를 뿜으며 피어 있다.
흘러간 내 삶의 한 순간에 머물러 있다가 문득 고개를 든다. 시든 장미 꽃잎을 떼어 내자 여전히 싱싱한 꽃으로 남아 있다. 프리지어는 꽃봉오리가 벌어지면서 그새 새 꽃이 피어나고 있다. 그 꽃을 보면서 아이들을 생각한다. 예쁘게 사랑하고 살고 있으니 그저 고마울 뿐이다.
모든 것은 흘러간다. 시간은 묘한 재주를 가졌다. 습기에 젖은 기억마저 꽃만큼이나 아름답게 느껴지게 만드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