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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설자 Mar 15. 2024

믹스커피 한 잔

하루를 건너는 힘을 준  

 

      

 요즘은 믹스커피를 가끔 마시지만 학교에 있을 때는 매일 마셨다. 출근하면 창문을 열어 환기를 하고 교실을 정리한 후, 아라비카 골드 믹스커피 하나를 풀어 휘휘 저어 마셨다. 달달한 커피 맛이 목을 넘어 몸속으로 흘러들어 가면 약간 상승한 기운으로 하루를 시작할 에너지가 생겼다. 그래서 우리는 아침에 마시는 믹스커피를 마약이라고 부르곤 했다. 교실 복도를 지나는 동료를 불러 “마약 한 잔 마시고 갈래?” 넌지시 유혹하곤 했다.


 전날 누가 가져다 놓은 알밤 두 세알과 들국화가 꽂아 있기도 하는 교사용 책상에 앉아 믹스커피 한 잔을 마시며, 조금 더 좋은 선생이 되리라 생각하곤 했다.


 잘 가르쳐야지. 아이들이 떠들어도 짝이랑 싸워도, 급식시간에 남은 핫도그 두 개 때문에 다툼이 생겨도 너그럽게 해야지, 달랑 한 줄 써놓은 텅 빈 네모를 보더라도 더 생각해서 써오라고 채근하지 말아야지, 수업과 상관없는 질문을 하면서 수업을 흩트려도 재치 있게 대답해 줘야지, 공책에 글씨를 엉망으로 쓰더라도 다음엔 조금 더 정성 들여 써 보라고 격려해 줘야지, 콩을 다 골라내는 아이에게도 한 조각의 반의 반 만이라도 먹게 해야지. 부족해도 다그치지 말고 여유 있게 품어 주어야지, 재미나게 수업을 하고 아이들과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많이 웃게 해야지….

 그런 생각들을 하며 커피를 마셨다. 매번 깨지는 약속이긴 했지만 그런 다짐을 하면서 더 나은 시간으로 나아가려 애써보곤 했다.


 교실에서 누군가 나를 지독히 힘들게 했던 날, 파김치가 되어 의자에 푹 잠겼다가 마시는 믹스커피 한 잔은 지친 마음에 달콤한 위로가 되곤 했다. 그 정도면 하루를 건너는 힘을 준 마약으로서 충분한 역할을 한 셈이다.


 가끔 퇴근 후에 내 친구 앤젤네 집에서 믹스커피를 마시기도 했다. 앤젤은 연아 커피를 좋아했다. 비가 올 듯 찌뿌둥한 날에는 커피가 더 당긴다면서 믹스커피 두 포를 뜯어 걸쭉하게 죽처럼 저어서는 ‘사약’이라 부르며 마셨다. 우리는 마약과 사약을 마시며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성토하기도 하고 반에서 생긴 일들을 하소연하며 서로 위로하곤 했다.


 할머니와 살면서 어린 시절부터 믹스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는 김달님 작가<우리는 조금씩 자란다>믹스커피를 이렇게 비유한다.


“좋은 원두로 내린 뜨거운 아메리카노는 깔끔한 코트 같지만 1분도 채 걸리지 않고 휘휘 저어 먹는 믹스커피는 가볍게 두른 따뜻한 목도리 같았다.”


 아마 믹스커피를 그린 최고의 문장이 아닐까. 그녀가 말하는 "커피 한 잔에 '나는 계속 살아갈 것'을 생경하게 느꼈던 순간"을 읽다가 나도 믹스커피 하나를 꺼내 뜨거운 물을 붓고 천천히 젓는다.


 목도리를 두른 듯 따스하던 지나간 어느 순간으로 돌아가고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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