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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설자 Apr 15. 2024

돌아가는 길

가벼운 발걸음이길

 

 모임을 마치고 집으로 오는 길. 저녁 9시가 넘었다. 퇴근길 사람들은 바삐 제 갈 길로 가고  장사하는 사람들은 바쁘게 정리한다. 문을 닫고, 옷 정리를 하고, 진열했던 상품을 집어넣고 또 내일 장사를 위해 마무리를 한다. 막 영업이 끝난 식당은 테이블 위에 소독액을 뿌리고 닦고 있다. 한 손에 소독제를 들고 뿌리고 한 손에 행주를 들고 닦아내는 그 바쁜 손놀림. 하루의 피로도 같이 닦아내고 있을지 모른다. 어서 집으로 가고픈 부푼 마음들이 보인다.


 아직 문을 연 도넛 가게 앞에 멈춰 선다. 다양한 모양의 맛깔스러운 도넛들이 앞으로 나란히 줄 서 있다. 달콤한 맛이 입에 고인다. 혼자 저녁을 먹은 그를 위해 두 개만 사려다가 하나 더 산다. 내 마음을 아는지 도넛을 담는 손길이 조심스럽다. 따스한 도넛이 든 봉지를 식지 않게 손으로 감싼다. 손끝에 전해지는 온기가 마음까지 이어진다.


 상가들이 늘어선 길을 걷고 있는 내 모습이 쇼윈도에 비친다. 경쾌한 하이힐 대신 푹신한 운동화에 짧은 원피스 대신 헐렁한 바지를 입은 한 여인. 하지만 편안하고 느긋한 모습이다. 문득 집으로 돌아오는 발길이 무겁던 지나온 한 시절이 흘러간다.


철창을 벗어나고픈 안쪽의 마음들


 아이들을 키워주시던 어머님과 함께 살던 때, 퇴근시간만 되면 아이들을 빨리 만나고 싶은 마음이 풍선처럼 부풀었다. 하지만 어머님과 마주하고 싶지 않은 마음 또한 구석에 자리하고 있어 집이 가까워질수록 발걸음은 더디었다. 언제나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 앞에서 나는 그대로 지나고 만다. 지하도를 건너 신세계백화점으로 곧장 갔다. 딱히 살 것도 없으면서 1층부터 하릴없이 배회하곤 했다.


 매장을 하염없이 돌아다니다가 윗 층으로 가면 엄마와 아기들이 푹신한 둥근 소파에서 놀고 있는 풍경을 만났다. 엄마 품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아이들을 보면 그때서 불에 덴 듯 집으로 향했다. 그렇게 바삐 집으로 왔건만 작은 집으로 들어가는 현관문은 왜 그리 무거웠는지. 사랑하는 아기들이 기다리고 있음에도 수백 년 넘는 동굴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어렵게 문을 열고 들어서면 갑자기 숨이 막혔다. 가슴이 답답했다. 뭔가 탁한 기운이 작은 공간을 꽉 메우고 있는 것만 같았다.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마구 청소를 했다. 이미 어머니가 손바닥만 한 거실과 방을 쓸고 닦고 걸레까지 깨끗하게 빨아 놓았건만 집에 오면 그렇게 수선을 떨었다. 내가 없는 동안 머물던 공기를 그렇게라도 새로 바꾸어놓아야 숨이 쉬어졌다. 당신이 한 청소가 못마땅하여 창문을 열어젖히는 물걸레질을 하는 모습을 보는 어머님 마음은 헤아리지 못했다.


 아기와 놀 시간도 없이 저녁을 준비할 때, 어머님은 당신 생각하지 말고 너희들 먹고 싶은 것을 해 먹으라 했지만 닭고기를 싫어하는 어머니 때문에 우린 닭고기 요리 하지 않았다. 콩나물은 목에 걸린다고 하고, 녹은 냉동 생선은 싱싱하지 않다는 불평에 얼른 손이 가지 않았다. 고향에서 푸른 비늘이 파닥파닥 살아 있는 생선만 드시던 어머니가 시장 좌판에 늘어놓은 냉동 고등어 같은 생선을 먹을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러니 시장에 가 사 오는 반찬거리가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어쩔 것인가. 그런 생선밖에 없는데. 우린 여전히 집 근처 시장에서 얼음물을 끼얹은 생선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퇴근하면 토끼 같은 아이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곧장 가지 못하는 마음은 괴로웠다. 날마다 길 위에서 뭔가 해결되지 않은 묵직한 마음으로 서성이면서 어서 시간이 빨리 지나가길 마음속으로 빌곤 했다. 여전히 나날은 더디 흐르고 집으로 가는 발걸음은 느리기만 했다.


하지만 어머님 덕에 어린 아가들은 사랑을 듬뿍 받으며 무럭무럭 자랐다. 날마다 힘겨운 어머님의 수고로움은 생각하지 못하는 날들이었다. 세월은 흘러 현관문을 열어도, 고향에 가도 어머님은 이제 계시지 않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평안하고 감사한 일인가. 오늘 하루를 애쓰며 보낸 이들이 보금자리로 돌아가는 모든 발걸음이 무겁지 않기를.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벼워지기를. 잘 쉬고 다시 새 날을 맞을 힘을 얻기를.


 집으로 들어서는 길에는 벌써 매화 봉오리가 벌어져 하얀 등불을 달고 있다.

 어서 그에게 도넛을 줄 마음으로 바삐 걷는다.        


며칠 사이에 이렇게나 환하게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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