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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설자 Jun 08. 2024

담쟁이

부드러운 파도를 만드는

        

담쟁이 파도가 긴 벽을 타고 너울거린다. 바람이 한차례 휩쓸고 가면서 부드러운 물결을 일으킨다. 한쪽으로 잎을 모아 밀려드는 파도. 담쟁이를 보려고 일부러 그 길로 돌아 담쟁이 벽을 따라 걷는다.


 어린 시절 하던 놀이가 생각난다. 담쟁이 줄기를 눈꺼풀에 끼워 집게처럼 벌리면 눈이 커지고 눈동자 가운데를 초록 줄기가 가르며 도깨비 눈이 된다. 그런 눈으로 손을 벌려 오그리고 서로 위협하는 장난을 했다. 해볼까? 하나 떼어내 눈에 끼운다. 그런들 어릴 적 마음이 살아날 리 없고 옆에는 같이 놀던 동무들도 없다. 담쟁이 줄기로 노는 별것 아닌 놀이로도 해가 기울도록 즐겁던 어린 시절.


 모리스 드리옹의 <초록 엄지 손가락 뚜뚜>에 나오는 뚜뚜는 특별한 손가락을 가진 아이다. 엄지 손가락을 문지르는 곳마다 초록 이파리가 돋아난다. 어디든 문지르기만 하면 벽에도 지붕에도 삽시간에 너울너울 초록 줄기들이 뻗어나간다. 쓰레기가 버려진 삭막한 땅에도 푸른 초원을 만들고, 감옥의 창살에도 푸른 숲을 만들어 죄수들의 삭막한 마음을 잠재운다. 심지어 총과 대포에도 푸른 잎이 피어나게 하여 전쟁을 멈추게 만든다. 온통 초록 융단으로 덮인 담쟁이 벽을 볼 때마다 밤새 뚜뚜가 다녀간 것은 아닐까 생각하곤 한다. 정말 그런 손가락이 있어 회색의 도시가 푸르게 변하면 얼마나 좋을까.


 

 

 동네에 가끔 가는 초밥집이 있다. 차도에 면해 있어 시끄러운 데다 황량한 고가 높은 벽이 앞을 가로막고 있어 삭막한 곳이다. 언제부터인지 고가 벽에 담쟁이가 너울거리며 벽을 온통 뒤덮었다. 식당에 앉으면 창으로 담쟁이 잎이 가득 들어와 식당 전체가 싱그럽다. 푸른 풍경을 덤으로 가지게 된 그 가게는 담쟁이 덕을 톡톡히 보고 있는 셈이다.


 언젠가 구청에서 담쟁이 뿌리로 인해 생길 수 있는 균열을 막으려고 농약을 뿌려 담쟁이 파도를 말려버렸다. 일시에 벽은 삭막한 시멘트를 드러냈다. 여름날 햇살에 마른 지렁이처럼 말라 비튼 앙상한 담쟁이 줄기만 힘겹게 벽에 붙들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벽은 다시 담쟁이로 뒤덮였다. 푸른 잎을 내밀어 보란 듯이 벽을 타고 기어오르며 너울거렸다. 덕분에 도로는 다시 싱그러운 초록으로 일렁였다. 그토록 싱싱하고 왕성한 담쟁이의 기력에 나는 슬그머니 박수를 보냈다.


 상수원 보호구역인 한강 강둑에는 풍부한 수분과 영양 덕에 나무들이 잘 자라고 있다. 포플러, 참나무, 느릅나무, 오래된 버즘나무, 늘어진 버드나무류가 우거져 있다. 그 사이로 고사목이 드문드문 보인다. 수령이 다한 나무들이다. 이 여름 폭력처럼 짙어진 다른 나무들에 비해 마른 채 풍성한 나무들 사이에 초라하게 서 있다. 마른 가지를 하늘로 뻗은 채. 그런데 둥치를 보니 풍성한 담쟁이가 감싸고 있다. 고사목 위로 담쟁이 이파리가 감아 올라가고 있다. 한 생을 다한 고목을 살려낸 담쟁이가 기특하다. 다른 몸을 빌려 새로운 세상을 구경하는 담쟁이의 재바른 모습에 웃음이 난다.    


우리 정원의 살구나무

서 있도록 받쳐주고

둥치를 감고 오를 담쟁이덩굴을 심었더니

곧 나무는 이파리로 뒤덮였네     

이제

우리 살구나무는 푸르러

심지어 12월에도     

이것이 거래:

죽음이 뿌리와 열매를 갖고

우리는 위조된 푸른 잎을 가졌지  


 문태준 시인의 글을 읽다 보니 이런 시가 있었다. 이름도 생소한 시인 자카리아 무함마드의 시다. 정원의 죽은 나무가 다시 살아나 푸른 잎을 보게 되자 시인은 마음이 놓였던 거다. 죽었던 살구나무가 살아 돌아온 듯하여 시를 읽는 나도 기쁘다.



 

 고향에 갔을 때 오랜만에 내 방으로 쓰던 곳에 들어가 보았다. 지금은 창고로 쓰고 있지만 어린 시절 혼자만의 방이라고 너무나 좋아하던 곳이다. 문득 슬레이트 지붕을 때리는 빗방울 소리를 듣던 그 시절로 돌아간다.


 창문을 열자 빗물이 방 안으로 튀어 들어와 얼굴에 떨어졌다. 비릿한 풀냄새 푸른 보리 냄새가 밀려왔다. 나지막한 밭담에 기어 올라온 연둣빛 담쟁이도 빗물에 젖었다. 빗방울이 돌담 구멍에 떨어져 부서지고 담쟁이 이파리에 잠시 휘청거리다 뭉쳐지며 둥근 미끄럼을 탔다. 턱 괴고 멍하니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이다음에 어떤 삶을 살게 될지 꿈꾸곤 했다.


 아련한 추억에서 깨어나 둘러보니 물건들이 엉켜 있다. 책들, 바구니들, 작은 가구들이 쌓인 위에는 거미줄이 쳐 있다. 폐가에 들어온 기분. 잡동사니들 뒤 깨진 유리창 틈으로 담쟁이가 넘어와 벽을 타고 줄기를 뻗어가고 있었다. 낡은 잡동사니들 위로 어찌나 싱싱한 잎을 가지고 있는지. 섬뜩했다. 방 안에 몰래 들어온 침입자의 서늘한 눈동자 같았다. 이파리에 떨어지는 빗방울이 꿈결 같던 그 예쁜 담쟁이덩굴이 마치 뱀이 기어가는 것만 같았다. 담쟁이 줄기를 들어 틈 밖으로 내보내고 깨진 곳을 판자로 가려놓았다.  


 담쟁이는 갈라지고 벗겨진 벽을 푸르게 덮어 오래된 남루를 감춘다. 고사목을 감아올라가 죽은 나무를 다시 푸르게 살게 한다. 너울거리는 파도 이파리에만 눈을 빼앗겨 조금씩 벽에 틈을 내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렇더라도 나는 담쟁이에 마음을 빼앗긴다.

오늘도 담쟁이 파도를 보려고 먼 길을 돌아서 간다.  

바람에 일렁이는 담쟁이 파도를 멍하니 바라본다.

끝없이 올라가 따사로운 햇살을 한없이 받기를.     

다만 어딘가에 상처를 내지 말고 사뿐히 밟고 자라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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