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으며 성장한다
걷기에 딱 좋은 계절이다. 걷는다는 것은 신기한 일. 한 발 한 발 내디딜 뿐이지만 까마득히 멀리 와 있다. 어느새 산수유 열매는 단단해지고 힘센 수크령이 고개를 쳐들고 있다. 히말라야 삼나무 아래를 지나면 마른 풀잎이 스치는 소리 아래 소멸하는 작은 것들이 다음 생을 기다린다.
숲 안에는 새로 만들어진 길들이 반들거린다. 원래 있던 길옆으로 여러 갈래 작은 길들이 구불구불 나 있다. 흙을 밟고 싶은 바깥의 마음이 다진 길들이다. 격리의 시절, 누군가로부터 시작한 한 발자국을 따라 뒤에 오는 발길이 다져놓은 길. 그 위에 쌓인 수많은 발자국이 긴 전염의 세월을 이겨낸 발걸음이 되었을 터다.
우리는 발걸음마다 한 줌씩 이야기를 흘리며 걷는다. 감자가 들어 있어 감자탕인 줄 알았다거나, 비둘기가 많아져 불임모이를 주어야 한다거나, 치과에 가기 싫다는 시시콜콜한 말들. 잘 해내지 못한 어린 부모 시절도 돌아본다. 남의 흉도 보다가 얼른 말머리를 돌린다. 의미 없다고 여기는 말들이 우리 거리를 좁혀 주고 그 사이를 말랑하게 채워준다.
쑥부쟁이 흐드러진 좁은 오솔길. 앞서가는 그의 발자국을 따라 걷는다. 이따금 돌멩이나 부러진 나뭇가지를 치우거나, 겨울 양식을 비축하느라 난폭해진 뱀이 나올 즈음엔 스틱으로 풀을 치며 간다. 뒤에 오는 사람을 위해 안온한 길을 만드는 일. 누군가에게 기울이는 마음은 그렇게 순하다.
앞서가는 그의 등. 이제는 중심에서 살짝 물러난 등. 살아온 시간이 얹혀 자꾸 내려가는 등을 보다가 고개 들어 하늘을 보라고 한 마디 한다. 참새들도 나무 사이로 포릉포릉 날아다니며 맞장구친다.
우리를 밀고 가는 부드러운 바람에 몸을 맡기며 시간을 옆구리에 끼고 걷는다. 걷다 보면 어느 순간 무거운 마음들을 땅 위에 부려놓고, 한없이 가벼워진 자리에 풀 냄새, 강물의 반짝임, 나뭇잎의 수런거림…. 이런 것들을 마음에 들여놓는다.
새로운 길에서 만나는 낯선 것들은 너무 빨리 스쳐 지나가기에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놓쳐버린다. 오래 들여다보면 그 대상이 말을 걸어와 우리 안에 잠자던 의식을 깨운다. 진정 위대한 모든 생각은 걷기로부터 나온다고, 걸으며 생각한 것만이 가치가 있다는 니체의 말을 떠올리며 걷는다. 한층 깨어난 사고의 층위에 ‘뜻하지 않게 현자가 된’ 한탸가* 걸어 나와 나직하게 들려준다.
“맑은 샘물과 고인 물이 가득한 항아리여서 조금만 몸을 기울여도 근사한 생각의 물줄기가 흘러나온다.”
내 안에도 고인 지성이 가득하여 기울이면 근사한 생각들이 쏟아지길 바란다는 말을 그에게도 들려준다. 그럴 때면 그도 나도 발걸음이 조금 느려진다.
걷다가 수시로 샛길로 빠진다. 샛길에는 우연한 것들을 만나는 기쁨이 있다. 잘못 간들 치명적이지 않다. 하지만 인생길은 샛길로 쉽게 갈 수 없다. 발 한쪽만 틀어 놓으면 새로운 길이 시작되는 대도 오로지 앞으로만 가곤 한다. 다만 용기가 부족할 뿐이다. 늘 ‘언젠가는’이라는 시간에 기대면서.
두 사람이 함께 걷는 人生. 다른 길에서 오던 두 사람이 한 길로 만난 ‘人’이, 한 방향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生’. 한 길에서 나란히 걸어간다. 비슷한 날들이지만 어제보다 더 두터운 마음이 겹쳐진다. 서로에게 길들인 시간의 주름은 서로를 더 자라게 하고 더 나아가게 한다.
어느 틈에 나타난 강가로 내려가 따스한 돌 위에 앉아 반짝이는 강물을 말없이 바라본다. 끊임없이 밀려와 돌 틈에 찰랑이며 속삭인다. 술렁거리던 어떤 것들이 부유한 채 떠나가고 어떤 것들은 가라앉는다.
한층 고요해진 마음속으로 기요메가 말을 걸어온다. 그는 안데스 산맥 한가운데 추락한 비행기에서 탈출하여 죽음으로부터 걸어 나온 비행사다.
“나를 구원한 것은 앞으로 내딛는 한 걸음이었어. 한 걸음 또 한 걸음. 언제나 똑같은 걸음으로 다시 시작하는 거지….” *
개인의 발전도 인류의 진화도 그 한 걸음으로 시작했다. 조금 더 버티고 조금 더 힘내고 그렇게 디딘 발걸음이 진보와 발전을 가져왔다. 내가 걷는 걸음은 그런 거대한 물줄기에 견줄 수 없지만, 개인의 변화는 곧 역사의 발전 한 모퉁이로 이어진다는 믿음이 한 걸음씩 나아가게 한다. 세상을 배우고 내 안을 들여다보며 지금보다 나아진 마음으로 다가오는 시간을 맞으러 간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걸으면서 성장하고 있다.
*보후밀 흐라발의 <너무 시끄러운 고독>
*생텍쥐페리 <인간의 대지>
<에세이문학>, 2024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