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집 마당
올레 담 아래는 꽃들이 피고 진다.
수선화, 제비꽃, 분꽃, 마농꽃, 채송화, 봉숭아가 저들이 필 시기를 알고 나란히 피어난다. 분꽃이 지고 까만 열매가 매달리면 하얀 가루가 나오는 분꽃 씨를 먹기도 한다. 봉숭아꽃이 피고 털이 보송한 열매가 달리고 봉긋 익은 코투리를 건드리면 오그라들면서 씨앗이 터져 나온다. 엄마에게 잔소리를 듣고 올레를 나서며 책가방으로 툭툭치고 화풀이를 하다가도 돌아올 땐 봉숭아 마른 잎을 떼어주기도 한다. 담 모퉁이에 신사라가 자라고 서쪽 담에 우람한 숙대낭(삼나무)은 여름 햇살을 가리는 그늘이 되고 그 많은 바람을 막아준다. 저녁이면 담 구멍으로 들어온 저녁노을이 분꽃 위에 고인다.
작은 마당에 병아리들이 어미닭을 따라 종종거리며 돌아다닌다. 마루 아래 빈 공간 토끼새끼도 숨어들어 순한 똥을 남긴다. 대낮에 구렁이가 마루 아래로 들어가는 걸 아버지가 장대로 휘감아 멀리 던진다. 그런 날 나는 꿈속에서 뱀이 우글거리는 땅에 발 디딜 곳을 찾지 못해 쩔쩔매는 꿈을 꾸기도 한다.
밤새 암소는 진통을 했고 아버지도 잠을 못 이루고 쇠막(외양간)으로 귀 기울인다. 마침내 태어난 송아지는 끈적끈적한 액체를 온몸에 묻히고 누워 있다가 비틀거리며 일어나 몇 발자국 걸어 다닌다. 비틀비틀 마당을 걷다가 후닥닥 뛰기도 한다. 그러다 어미에게 달라붙어 젖을 먹는다. 방금 태어나 난 송아지가 벌써 네 발 직립을 하고 뛰어다닌다. 동생은 아직 걷지도 못하는데, 인간이 진화가 덜 된 걸까.
마당에는 온갖 냄새가 피어난다.
감꽃 향기가 밀려오고 향긋한 유지꽃 향기가 마당에 고인다. 비가 오면 우영팟 가에 쌓아둔 두엄에서 열기가 안개처럼 피어오른다. 거름 냄새, 오줌 냄새, 쇠똥 냄새 같은 시골 냄새가 마당에 날아다닌다. 언제나 익숙한 냄새다. 비에 젖고 바람에 마르며 두엄 냄새가 날아가면 풀냄새가 가득해진다. 된장 콩을 삶는 구수한 냄새, 들깻단 타작할 때 퍼지는 고소한 냄새, 제삿날 고사리 볶는 냄새, 고기 굽는 냄새가 올레 밖까지 새어 나온다.
낮은 지붕을 얹은 초가집은 해마다 새(띠)를 엮어 지붕을 다듬어야 한다. 오래된 새를 걷어낼 때는 굼벵이 같은 벌레도 나온다. 깨끗한 새를 지붕에 두껍게 올리고 그것을 묶어주는 줄을 꼬느라 이웃 아저씨가 돌리는 술비통에서 나온 기다란 줄이 올레 밖까지 이어진다. 말끔하게 단장된 초가 처마에는 다시 제비들이 날아와 집을 터다. 꼭 신발을 벗고 올라서는 댓돌을 겨냥하고 똥을 떨어트리지만 제비는 길조라서 우리와 같이 살게 둔다.
제비 새끼들이 입을 벌리고 엄마를 기다리는 모습은 엄마를 기다리는 우리와 닮아 있다. 아버지는 군에 가 있고 늦도록 밭에서 일하고 돌아오는데 낭간(툇마루)에 오누이가 앉아 “엄마, 엄마” 부르며 울고 있더란다. 지난한 엄마의 삶이 그 한마디에 다 들어 있다.
마당 동쪽에 낮은 책상까지 갖춘 조그만 내 방이 생기고부터 나는 본가로부터 독립한다. 혼자 쓰는 공부방이 생기자 갑자기 쑥 자란 기분이다. 조무래기들과 마주 앉아, 한 다리, 두 다리 놀이도 하고, 귀신 이야기에 소리를 지르며 이불속에 숨어든다. 책상 위에 촛불 켜고 졸다가 앞머리를 꼬시리고 화들짝 놀라기도 한다. 누워서 천장에 온갖 망상을 그리던 그곳은 늘 따듯하고 안전한 동굴처럼 느껴진다. 서러운 생각이 후빌 때마다 혼자만의 세상을 만들어가던 마법의 장소다.
세월이 흐르고 이제는 창고로 쓰고 있는 그 방에는 책들, 바구니들, 작은 가구들, 온갖 잡동사니들이 쌓여 거미줄이 이리저리 얽혀 있다. 깨진 유리창 안으로 들어온 담쟁이 줄기가 푸른 잎을 달고 있다. 어쩐지 뱀이 기어가는 듯 섬뜩하다. 그곳은 더 이상 마법의 장소로서 기운을 상실한 걸까.
계절이 머물다 가는 마당. 물 뿌리고 빗자루로 쓸어 놓으면 담 구멍으로 늦은 저녁 햇살이 내리던 마당에 어느덧 겨울바람이 차지한다. 휘몰아치던 싸락눈이 밤새 함박눈이 되어 하얗게 쌓인다. 처음 밟는 뽀드득 소리. 발자국으로 꽃을 그리며 눈부신 세상을 밟는다. 자연만이 사람을 고요하게 만든다. 눈 온 마당에서 나는 환희와 고독을 한꺼번에 경험한 건 아닐까.
동백꽃 진 마당에 고요만 남아 있다. 우리가 자라 모두 떠난 적막이 가득한 마당. 운전한 지 언제인지 모르는 경운기는 한 구석 담 아래 세워진 채 녹슬어간다. 마당 앞밭 귤나무에는 새들의 먹이 정도만 귤을 매달고 올레에 피던 꽃들은 이제 없다. 가지, 오이, 풋고추 같은 채소가 자라던 우영팟에는 망초만 가득하다. 아버지가 봄동을 뜯어 된장국 끓이는 엄마에게 건네주곤 하던 눈 내리는 아침들은 이제 모두 과거의 한 순간으로 흘러가버린 우리 집.
시간의 지층에 우리 이야기를 간직한 채 세월이 내려앉은 마당에서 무엇을 잃어버린 듯 나는 우두커니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