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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

빗물 고인 웅덩이에서

by 오설자


아, 저, 하얀, 무수한, 맨종아리들,

찰박거리는 맨발들.

찰박 찰박 찰박 맨발들.

맨발들, 맨발들, 맨발들.

쉬지 않고 찰박 걷는

티눈 하나 없는

작은 발들.

맨발로 끼어들고 싶게 하는.


-황인숙(1958 ~ ) '비' 전문



황인숙의 시 <비>를 다시 찾아 읽는다. 이 시를 읽을 때마다 어린 날로 돌아간다.


친구들은 엄마가 가져온 따스한 우산 속으로 들어가 집으로 가는데 나는 우산이 없었다. 같이 쓰라고 했지만 계속 기다리며 남아 있었다. 자존심.


책가방을 머리에 이고 교문까지 뛰었다. 그러다 이미 젖은 옷은 다시 젖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천천히 비를 맞고 걸었다. ‘맨발, 맨종아리’인 빗방울들이 얼굴을 때리고 몸으로 흘러들었다. 신발은 물이 고여 철벅거리고.


이렇게 홀딱 젖어 비 맞은 참새꼴을 엄마에게 딱 보이고 싶었다. 올레 앞에 와 보니 풀밭 웅덩이에 빗물이 푸르게 고여 있었다. 가방도 신발도 벗어던지고 웅덩이에 들어갔다. 물에 누운 잔디의 촉감이 발바닥 닿았다. 초록물에 첨벙이며 미친 듯이 춤을 추었다. 세찬 비를 맞으며 정신없이 뛰다 보니 내 몸 안에서 알 수 없는 희열이 올라왔다. 짜릿한 자유의 기쁨.


온통 젖은 채 마당에 들어선 나를 본 엄마는 몸이 아파 못 갔다며 미안해했다. 마른 옷으로 갈아입고 마루에 앉아 뒤뜰 감나무와 댕유지 이파리가 비바람에 뒤집어지는 걸 보며 나는 왠지 슬펐다. 막 사춘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 아무 근심 없이 풀밭 웅덩이에서 물을 튀기며 춤추고 싶어지는 날.


기분이 가라앉고 불쾌한 장마철이어도

구름 속에는 찬란한 해가 빛나고 있는 걸

기억해야지.




비 갠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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