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걷기

쌍화차 한 잔에 마음을 녹이고

by 오설자

뚜벅이 가는 길


언 땅을 헤쳐 겨우내 기다렸던 싹들이 올라오는 간지러움을 몸으로 느낀다.

정읍 백양사에 들리고 광주로 건너가 도시를 어슬렁거리고 오기로 한다.


남쪽으로 내려가는 열차에는 어르신들이 많다.

“냉장고에 거시기 있응께, 그거 먹어.”

“논산까지 가니께 먼저 내리니 안쪽에 앉으셔.”

정다운 말소리들.


창밖은 이른 봄, 텅 빈 들 너머 능선의 나무들 사이로 햇살이 비친다.

가뭄이 계속되어 온 산하가 바삭하게 말라가지만 강가를 지날 때는 연두스름한 안개가 떠돈다.

익산을 지나면서 딸기 여사를 떠올린다. 잠깐의 인연이지만 정겨운 만남이다.

이번 여행에서는 어떤 인연을 만나게 될까.

우연히 스친 사람들은 나의 여행에 어떤 색깔을 가져다줄까.



쌍화차 한 상


정읍에 내리자 뿌연 먼지가 먼저 우리를 맞는다.

황사가 벌써 시작이구나. 길 잃은 사람처럼 두리번거리면서 발 닿는 대로 걷는다.

단풍철에 단풍잎보다 많은 사람으로 물들이는 이곳. 15분쯤 걸었더니 어디서 풍기는 진한 쌍화차 냄새.


쌍화차거리다.

‘다인’, ‘녹차마을’ 같은 쌍화차 전통찻집이 늘어선 거리를 돌다가 이름이 다정한 ‘연’으로 들어간다.

아늑한 찻집에 가득한 쌍화차 냄새. 구운 누룽지와 가래떡, 꿀, 둥그런 돌 사발에 담은 쌍화차 한 상 받고 눈이 휘둥그레진다. 밤 대추 잣 같은 것들이 가득 들어 있어 쌍화차 죽 한 사발이다.

‘원기를 회복하고 피곤을 풀어준다’는 차를 마시니 기운이 난다.


진한 쌍화차 한 상

내장사


“내장사까지는 택시로 가고, 내려올 때 호반길 걷자.”

좋은 생각. 고요한 이곳에 물소리와 사부작사부작 걷는 우리 발소리뿐이다.

굴거리나무 자생지라서 곳곳에 굴거리나무 잎이 반짝인다. 제주 올레길에도 굴거리나무가 많던데. 숲새, 올빼미, 노랑참새, 딱따구리가 있다는데 수다스러운 새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마른땅에 상사화 싹이 보인다. 산수유 봉우리도 막 피어나려 얼굴을 내밀고 있다.

겨울 언 땅을 밀고 새 생명으로 다시 오는 그것들이 대견하다.


산그늘 진 어두운 길.

산속에 보물이 많다고 하여 내장사라고 이름 지었다는데 들어가는 일주문이 우아하다.

경내에 들어서니 숨었던 해가 환하게 비춘다.

모든 세상의 빛이 한 곳에 모이는 듯. 아하, 이것이 보석이 아닐까.

내장사는 대웅전이 없고 부속 사찰만 있다.

육이오 때 전소되어 다시 중건했다는데 대웅전을 지으려고 보시를 받고 있었다.


차가운 법당 마루에 엎디어 절할 때는 한없이 마음이 바닥으로 내려앉는다. 먼지 같은 중생.

옆으로 원적사 백련암을 도는 3.2킬로의 길을 걷다가 돌아 내려온다. 산길이라 험할지도 모르고 이미 오후가 늦어 어두워질 것 같아서다.

파랗게 얼어 있는 하늘 아래 나뭇가지에서 노래하며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참새들의 날갯짓이 겨울나무 사이로 분주하다.


정읍터미널 근처 국화회관에서 푸짐한 저녁. 우렁쌈 불백. 한 상 푸짐하게 나온다. 깻잎절임, 도라지 무침, 시금치 무침, 표고 무침, 상추 세발나물 겉절이, 꽈리고추찜, 무김치. 배추김치. 우렁이 새콤 무침, 갈치속젓, 그리고 우렁 청국장과 우렁 쌈장이 뚝배기에 나온다. 거기에 돼지고기와 문어와 콩나물을 볶은 것을 쌈에 싸서 먹는다. 우렁쌈장이 독특한 맛이 난다. (이 집 우렁쌈장이 맛있어서 결국 나중에 택배로 시켜 친구들에게도 나누어주고 여러 번 시켜 먹었다.)

가까이 있는 정읍천을 산책하고 따듯한 침대에서 글을 쓴다.

밤이 깊어간다.



백양사는 봄빛에 젖어


다음 날, 백양사로 가는 오전과 오후 하루 딱 두 번 다니는 버스 시간에 맞추려고 정읍천을 거닌다.

넙데데한 돌에 앉아 마른풀 사이로 막 돋아나는 초록이들. 흐르는 물이 맑다.

이제 봄이 되었으니 저들도 신나서 흐른다.

키오스크로 버스표를 사는데 어르신들 몇 분이 몰려온다.


“이렇게 표를 끊는갑소 이?”


몇 번 터치하고 차표가 나온다고 했더니 신기하게 구경한다. 이런 풍경 정겹잖아.

백양사까지는 30분이 채 안 걸린다. 버스는 시골길을 이리저리 돌고 ‘사거리터미널’에 들렀다가 백양사로 간다. 네거리가 아니라 마을 이름이 사거理다.


고즈넉한 백양사 가는 길. 우리만 있다.

단풍철에는 사진 찍으려 사람들이 줄 섰을 ‘백암산백양사’ 표지석이 오늘은 혼자다. 우람한 일주문. ‘고불총림백양사’ 현판 너머 고목들이 줄 서 경배한다.


일주문 앞 기념품 가게 아저씨가 “이리 와~” 하며 수탉 한 마리를 데리고 산책길을 따라 걷는다.

수탉은 땅에 떨어진 것들을 주워 먹다가 산책 시간이 기억난 듯 부르는 소리에 주억거리며 따라간다.

뒷짐을 지고 앞서는 아저씨 뒤를 강아지처럼 쫄쫄 쫓아 호수 한 바퀴를 돈다.

그 뒤에 이른 봄 짧은 햇살도 뒷짐 지고 따라간다.


드디어 쌍계루.

단풍 사진에 제일 먼저 걸리는 그 유명한 누각. 늠름한 쌍계루 기둥이 호수에 어른거린다. 피서 철이 끝난 바닷가에 온 것처럼 고요하다. 하늘과 땅과 모든 풍경이 온통 우리 것이다. 이 고요를 이때가 아니면 어찌 누릴 수 있을까. 쌍계루 앞에 정몽주가 쓴 시 현판이 있다.


구시금견백암중

파필침금괴불능

청수기루명시중

목옹작기가환중

연광표묘모산자

월영배회추수징

구향인간번열뇌

불의하일공군등


“지금 시 써 달라 청하는 백암사(현 백양사) 스님을 만나니

붓을 잡고 생각에 잠겨도 능히 읊지 못해 재주 없음이 부끄럽구나

정수 스님이 누각을 세우니 이름이 더욱 중후하고

목은 선생이 기문을 지으니 그 가치가 도리어 빛나도다

노을빛 아득하니 저무는 산이 붉고

달빛이 흘러 돌아 가을 물이 맑구나

오랫동안 인간 세상에서 시달렸는데

어느 날 옷을 떨치고 그대와 함께 올라보리"


고려 말 어지러운 시기. 임금과 함께 조용한 풍경을 감상할 수 있을지 편안하지 않은 마음이 읽힌다.

그도 고요를 사랑했던 거다. 하긴 세상에 고요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고요가 다 모인 3월의 쌍계루


목탁소리도 불경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단아한 대웅전에 들어가 보시하고 엎드린다. 오백나한전, 철불상, 고려시대 탑도 둘러본다. 많이 부서졌지만 경쾌하게 끝이 올라간 탑이 살아 있다. 고요한 산사에 오니 마음이 저절로 가다듬어진다. 절만 찾아다니는 뚜벅이를 해 볼까. 뚜벅이 내공이 더 쌓이면 테마별로 해 보자. 절을 찾아서, 호수를 찾아서, 강물길 따라…



천진암 토끼 보살


자연탐방로를 따라 걷다 보니 조릿대숲에 부전나비출몰지역이라는데 나비는 보이지는 않는다. 아직 때가 아닌가? 비자나무도 많다. 제주도에만 비자림이 있는 줄 알았는데 여기도 비자나무 자생지다.


자연탐방로 끝나는 지점에 있는 천진암. 아담한 법당건물 뒤로 대나무 숲이 병풍처럼 펼쳐진 작은 암자다. 절 마당에 장독대가 즐비하다. 인상 좋은 보살님이 나오더니 웃으며 이것저것 묻는다.


“천천히 구경하시고 이따 쩌기로 오세요. 차 한 잔 드릴게요.”


호스로 수돗물을 통에 받으며 시원한 물줄기처럼 말을 뽑아낸다.

여기는 원래 비구니사찰이었는데 템플스테이를 하고 사찰 음식 교육장소로 쓰고 있어요. 오늘은 스님들이 출타 중이라 쉬고 있어요. 여행 다니는 모습이 참 좋네요. 이제 엄마 졸업했으니 딱 좋은 때지요.

알고 보니 그도 토끼띠.


“어머나, 난 토끼띠 만나면 너무 좋더라.”


호스를 내던지고 토끼 보살이 내 손을 잡는다. 사찰음식을 만드는 주방에 초대받아 차도 마시고 방울토마토를 먹으며 이야기를 나눈다. 천진암 토끼보살은 얼굴 가득 웃음을 담고 쉬지 않고 이야기를 한다. 그녀는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느긋함이 있다. 한참 앉아 그녀의 인생길도 듣고 고마운 인사를 하고 헤어진다.


우연히 스치는 인연에서 삶의 모습을 배우고 그들의 인생 한 자락에서 살아갈 지혜를 얻는다.

이런 기쁨이 있어 여행이 빛난다.


내려오는 길은 이상하게 더 빠르다. 원래 그렇다.

아저씨와 산책 나간 꼬끼오도 집으로 갔나 보다. 모두가 고요 속이다.


노란 버스를 타고 내려간다.

장성은 옐로 도시라고 군수가 노란 꽃을 심고 축제를 기획했다고 하는데. 저쪽은 보라섬, 여기는 노란 마을. 다리도, 지붕도 벽도 노랑이다. 노란 군내 버스는 1000원만 내면 군내 어디든 갈 수 있으니 어르신들에게 좋은 이동수단이다.



다리도, 지붕도, 노랑노랑

우리는 사거리에서 내려 호반으로 올라간다. 조용한 오후. 수변길을 걷는다. 넓은 강가에 펼쳐진 갈대밭에 바람이 살고 있다. 한참 올라갔더니 장성댐과 커다란 호수가 나온다.


고요한 호수 둘레길을 말없이 걸으며 자연의 일부가 되어 본다. 대숲을 지날 때는 댓잎파리가 소리가, 소나무 길을 걸을 때는 솔잎 향기가 우리를 안내한다. 아무도 없는 길을 걷다 보니 벌써 산노을이 진다.



장성호반 둘레길, 여기도 고요가 가득



광주에 도착하니 밤이다. 택시를 타고 도청 앞 건물을 지날 때 광주의 봄을 생각한다. 어쩐지 비장한 마음. ‘금남로’라는 말만 들어도 서늘해진다. 트럭을 타고 방송을 하는 어린 여대생으로 출연했던 이요원의 비장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저 도청 건물에 모여 총을 맞고 모두 전사한 그 시절 광주의 주역들. 벌써 43년이 지난 세월이다. 기사님은 그때 어렸다고 한다. 나는 막 대학에 들어간 해였고.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여전히 상처는 남아 있다.


먹자골목에서 저녁을 먹고 숙소로 온다.

침대를 따뜻이 데우고 누우니 노곤하다. 오늘 거의 3만 보. 많이 걸었네.


증심사


새벽. 공기가 서늘하다. 운림 51번 버스를 타고 증심사 입구에 내린다. 무등산 지역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지질트레일 지역이다. 새벽녘에 걸으니 물소리가 더 선명하다. 시각 대신 청각이 더 예민해진 탓. 새벽닭 울음소리 들으니 정신이 난다. 혁명을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닌데도 마음이 단단해지고 숙연해진다.


의재 허백련의 미술관 앞을 지나는데 너무 일찍이라 들르지 못한다. 남종화의 대가라는데. 미술관에 들어가 보면 좋으련만 다음으로 미룬다. 서서히 날이 밝아 오고, 어디서 매화향이 진하다.


증심사는 9세기경에 세워진 절인데 중간에 4차 증축을 하고 전쟁 때 소실된 것을 1970년대에 복원하여 오늘날에 이른다. 오래된 돌담에는 이끼가 끼었고 높은 곳에 대웅전이 자리하고 있다. 절 경내를 그린 남종화풍 안내도. 고아하고 품위 있는 이런 안내도 좋더라.

대웅전은 위풍당당하면서도 아담하고 자상해 보인다. 남성적이면서도 단단한 내면을 가진 그러면서도 세심한 모습이랄까. 대웅전 안으로 들어가 합장하고 절을 한다. 오백나한전도 있다. 석가모니와 아난과 가섭존자 그리고 열여섯 제자가 있고 그 뒤로 오백 명의 나한상이 있다. 주심포 양식의 지붕도 보고, 손 모양이 독특한 검은색 철조비로자나불은 비로전의 보물 131호다. 원통전 석조보살입상 뒤로 설산수도상 그림에 부처에게 죽을 바치는 이가 수자타라고 한다. 아하, 그래서 절 아래 ‘수자타’라는 식당이 있었구나.


송정역으로 가는 버스를 타자마자 눈꺼풀이 내려온다. 어제 너무 많이 걸은 탓. 한참 침 흘리며 자다가 깼더니 금남로도 지나고 광주천을 지난다. 송정역에 내려 식당을 찾는다. 반찬이 한 상 가득 차려 나오는 남도의 음식을 먹고 싶은데 맨 국밥집이다. 송정역 1913 시장 간판 위로 영명국밥이 보인다.


“어? 저거 유명한 국밥집이야.”


모둠국밥을 주문했더니 김치와 마늘장아찌, 양파 된장. 다행히 밥이 따로 나온다. 나는 밥이 국에 말아진 것은 비추. 따로국밥이 좋다. 순댓국 건더기는 보들 말랑하고 국물도 시원하고 맛있다. 삭 비우고 나오는데 기다리는 사람이 열 명이 넘는다.


1913송정역시장


시장길을 어슬렁거리며 ‘뒷골목을 산책하고 구경하며 거리를 배회하는 산책자’가 되어 본다. 그것은 ‘뒷골목의 겸손한 생활을 보고 내면의 깊이를 찾는 작업’이라고 박진배는 말한다. 그곳의 바람을 마시고 골목에서 흘러나오는 음식 냄새와 소리들을 들으며 걷는 것이 진짜 여행이다. 그야말로 발길이 닿는 대로. 발로 딛지 않은 곳은 여행한 곳이 아니다.


청년들이 꾸민 가게들이 아담하고 깔끔하다. 빵집에서 새어 나오는 고소한 빵 굽는 냄새가 달콤한 골목으로 만든다. 예쁜 가게들에 전라도 말을 써 놓은 의자들이 곳곳에 놓여 있어 눈길이 간다.

‘감시롱 옴시롱 좋음시롱’

‘야, 있냐~ 거시기 머시기 하당게‘

‘허벌나게 맛난디’

‘아따 솔찬히 편허요’

‘뭣이 중헌디?’ 같은 정겨운 말들을 웃으며 보다가 어떤 말에 딱 눈에 닿는다. 담배를 피우는 그를 돌아보며 도끼눈을 하고 그 말을 따라 한다.


“거 좋지도 않은 거 뭐더러 자꾸 펴싼다요!”


인테리어가 예쁜 카페 ‘꽃을 피우다’ 이층으로 간다. 의자도 책상도 아주 스타일리시하다. 광주의 마지막 장소로 최적이다. 앞뒤로 창문이 활짝 열려 탁 트인 곳. 벽에 쓴 문장이 확 잡아 끈다.


“난 오늘도 당신과 함께여서”


좋다는 말이겠지.

아닐 수도 있겠다.

누구나 각자의 상황에서 그 말은 해석될 테니까. 당신과 함께인 나에게 하는 말이겠지?

기차를 타고 한 자리씩 차지해서 금세 곯아떨어진다. 3일 동안 우리가 걸은 거리 총 66908보. 약 30킬로.


이번 뚜벅이는 산길을 주로 걸었다.

고요한 길을 걸으며 소란한 무엇을 많이 내려놓으며 편안해졌다고 할까. 더 많은 이야기도 간직하게 되었다. 서로 생각이 다르더라도 그 간격을 공감해 주고 인정해 주면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감사한 일이다.


“내장사 가는 길이 좋았어.”

나도 그랬다. 장성 호반길도, 우연히 만난 좋은 인연 토끼보살도.

명산대찰의 좋은 기운을 받으며 내장사 백양사와 천진암 증심사로 이어지는 고요한 걷기를 하며

길 위에서 고요해진 나를 만나고 왔다.


송정역 1913시장 근처 카페 ‘꽃을 피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