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설자 Dec 10. 2018

내 기억 속의 노래들

          

 나른한 봄기운과 식곤증이 여고생들의 부푼 허리를 감싸고 있는 5교시 국어시간. 수업시간에 단 일분도 허투루 보내지 않기로 유명했던 선생님은 거의 빈사상태인 우리들 모습에도 아랑곳없이 교과서를 펼치셨다. 두툼한 입술을 가진 인정 많은 분이었지만 수업은 칼같이 시작하고 고무줄처럼 끝날 줄 몰랐다. 도대체 쉬는 시간을 안 주셨다. 한 친구가 손을 번쩍 들었다.

 

  “선생님, 제가 어젯밤에 시 한 편을 썼어요.”

  "어, 그래? 어디 낭송해 봐라.”


 그 친구는 예의 장난기가 넘치는 표정을 감추고 잔뜩 감정을 넣어 과장된 몸짓으로 오른손으로 허공을 가르며 시를 읊기 시작했다.   

   

     장미

    당신에게서 꽃내음이 나네요

    잠자는 나를 깨우고 가네요

    싱그런 잎사귀 돋아난 가시처럼

    어쩌면 당신은 장미를 닮았네요

    

  느닷없이 펼쳐진 시 낭송에 우리는 터지는 웃음을 참느라 입을 꽉 다물고 있었다. 모두 선생님께 눈을 모았다. 뭔가 흥미로운 일이 일어날 거라는 기대가 교실 안에 뭉그적거리던 봄기운을 밀어내고 튕겨나갈 듯 팽팽했다. 들키는 날에는 우리 모두 공범으로 선생님께 영락없이 단체 기합을 받을 터였다.

 

 “음…. 좋은데, 잘 지었네. 그런데 좀 속된 느낌이 드는구나.”


 역시 국어 선생님다웠다. 바른생활 학구파 선생님이 당시 유행하던 대중가요를 알지 못하셨나 보다. 다음날, 그 친구는 교무실로 불려 갔다. 그러나 다시 나타난 그 친구는 손가락으로 ‘V'자를 그리며 방긋 웃었다. 그 후 그분을 융통성 없는 선생님으로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고등학교 시절 그 노래는 유쾌한 기억으로 남았지만, 내 청춘이 불안했던 날들 내가 좋아했던 노래는 우울했다. 가족들이 원하는 교대는 가기 싫었다. 넓은 세상으로 나가 매력적인 직업을 가지고 내 꿈을 펼치고 싶었다. 흰 셔츠 소매 단을 재킷 밖으로 접어올리고 커다란 잡지를 손에 말아 쥔 채, 빌딩 사이를 활보하는 워킹우먼. 내가 디자인을 한 옷이 쇼윈도에 걸리고 모델들이 런웨이를 걷는 꿈을 꾸었다. 때론 방송국에서 대본을 들고 바쁘게 뛰어다니는 상상도 했다.


  매일 수업이 끝나면 시내 음악다방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젊은 날 할 일이 많은 시기였음에도 나는 꿈이 없었다. 세상이 나를 버린 것 같았다. 그때 나를 뒤흔든 노래가 있었다. 록그룹 켄사스가 부른 Dust in the wind였다. 세상만사가 바람에 날리는 먼지라며 우울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기타와 바이올린의 기막힌 어울림이 음조를 더 애절하게 만들었다. 나는 우주 속에 먼지 한 톨보다 더 작고 보잘것없는 존재 같았다. 매일 먼지처럼 이리저리 흩날리며 이 노래를 주문처럼 웅얼거렸다. 내 인생이 빈껍데기 같던 시절이었다.


  연애할 때 가족들의 반대로 나는 많이 지쳐 있었다. 사랑을 포기하고 싶었다. 어느 날 퇴근하고 오디오를 틀었는데 생상스의 ‘백조’가 흘러나왔다. 스피커에서 나오는 끊어질 듯 애절한 첼로 음이 나를 감전시켰다. 나는 옷을 갈아입지도 못하고 방바닥에 밀가루 반죽처럼 늘어졌다. 죽어가는 순간의 백조를 연기한 안나 파블로바. 날개를 파닥거리다 마침내 숨을 거두는 깃털의 미세한 떨림. 어지러웠다. 내 의식의 한 오라기도 남김없이 모두 기어 나와 방바닥을 흘러 다니는 것 같았다. 내가 죽을 것 같았다. 눈물이 쏟아졌다. 백조는 사랑을 얻지 못하고 죽었지만 나는 죽을 수가 없었다. 한참 후 마음이 편안해졌다. 나는 일어나 앉았다. 사랑을 쟁취할 수 있는 오기가 생겼다.


  그이는 가끔 기타 연주를 들려줬다. 전주가 한참 흐른 후에 ‘다정한 연인이 손에 손을 잡고 걸어가는 길 ~ ’이 이어졌다. 그 울림이 가슴을 타고 전해지면 음악 속으로 들어가 그와 다정하게 손잡고 그 길을 걸어가는 것만 같았다. 낙원이 어서 오라고 손짓했고 나는 얼른 따라갔다. 그리고 그의 아내가 되었다. 큰아이를 가졌을 때, TV에서 흘러나오는 '북한강에서'라는 노래를 넋을 놓고 듣고 있었다. 다음날 퇴근하는 남편의 한 손에 엘피판 하나가 들려있었다. 얼른 포장을 뜯고 턴테이블 핀을 얹었다.    

  

  저 어둔 밤하-늘에 가득 덮인 ~  

   

  떨리는 저음의 노래가 작은 방안 가득 퍼졌다. 눈을 감고 북한강으로 달려갔다. 두발을 담그고 안개를 마구 휘저었다. 이슬 묻은 새벽이 가득 내린 강가에 나앉아 차가운 공기 속에 이제  깨어나는 우주를 마주하고 있었다. 안개가 서서히 걷히고 가슴이 열리고 세상이 열렸다. 아침마다  노래를 들으며 버스 소리 대신 강물 소리를, 서울의 탁한 공기 대신 북한강의  그림자를 뱃속의 아기에게 보여주었다. 북한강의 잔잔한 물안개가 가슴 가득 피어올랐다.


 

  나는 설거지하면서 곧잘 노래를 부른다. 흥겨울 리 없는 설거지이지만 노래를 부르면 싫다는 생각이 덜하다. 남편은 콧노래 부르면서 일하는 내 모습을 좋아한다. ‘이왕 일할 거 즐겁게 하라’는 그의 삶의 모토에 부합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가끔 ‘가고파’나 ‘님이 오시는지’, ‘A time for us’ 같은 노래들을 흥얼거린다. 그때마다 아들이 장송곡 같다고 놀리거나 말거나.


‘가고파’를 부를 때마다 나는 더 간절해진다. 그 노래에 얽힌 이야기 때문이다. 작곡가 김동진이 월남할 때 38선에서 북한 정보장교에게 체포되었다. 이제 죽을 일만 남았다. 뭐 하는 사람이냐는 질문에 ‘가고파 김동진’이라고 했더니 장교가 한마디 했다.


 “그러면 가고파를 한 번 불러보시오.”


  어둠이 감싼 밖은 바람소리도 숨을 죽였고 싸늘한 공기가 흐르는 인민군 장교 앞에 있던 그가 가늘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 눈에 어리네~~  

   

  죽음을 눈앞에 두고 부르는 노래는 또 얼마나 처절했을까. 조용히 눈을 감고 노래를 듣던 장교의 얼굴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노래 정말 잘 들었소. 내려가서 좋은 노래 많이 만드시오.”


 장교는 남들 모르게 그를 뒷문으로 풀어주었다. 이데올로기도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리는 예술의 힘. 그 인민군 장교는 군인이기 이전에 진짜 예술가이며 로맨티시스트가 아닐까. 그 노래를 부를 때마다 꿈엔들 잊을 수 없는 그 장소에 서 있는 것처럼 나도 비장해지는 것이다.


  살아보니 장미꽃처럼 빛나는 신세계이기도 하고, 먼지처럼 허무한 세상이 되기도 했다. 좋은 노래들은 때론 내 마음속 상처를 이불처럼 덮어주기도 하고, 살아가는 기쁨을 더해주기도 했다. 순간순간 마음을 녹였던 노래들이 있어 내 인생이 조금 촉촉해지지 않았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부모의 마음 3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