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설자 Mar 10. 2019

내게 글을 쓴다는 것은

왜 쓰는가

                 

 내 방 창 앞에는 나무들이 많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댓잎파리들이 비비고, 감나무에 앉은 참새, 직박구리 소리가 가까이서 들렸다. 유리창에 가득 부딪치는 아침햇살에 잠이 깨곤 했다. 유자꽃이 피었고, 꽃이 진 자리에 매미소리가 자지러졌다. 흙냄새가 더 진해지는 가을이 지나면 눈보라에 창문이 덜컹거렸고 나는 이불속으로 파고들면서 자라났다.


 그 작은 방에서 계절이 변하고 하늘빛이 달라지는 것을 보며 가슴속에 꿈틀거리는 것 또한 함께 자라났다. 깊은 밤, 라디오를 들으며 가보지 않은 신세계로 향하는 꿈을 키웠고 연애편지를 쓰면서 온통 미사여구들이 날아다녔다. 글을 쓰는 것이 마치 나에게 주어진 사명인 것처럼 쓸 때도 있었다. 노트에 적어둔 것들을 지금 읽어보면 정말 어이없고 치졸하지만, 쓰고자 하는 열망은 지금보다 훨씬 더 진했던 듯하다.  


세월이 흘러 나도 글을 쓰는 사람이 되었다. 가끔 내가 쓴 글을 아들에게 읽어보라고 할 때가 있다. 제1 독자로 대접하는 것을 영광스럽게 여기라고 했더니, 아직은 엄마 글이 영광스러워할 수준이 안 된다고 일침을 놓았다. 누군가에게 ‘가슴속에 남아 있고, 다시 읽고 싶게’ 만드는 글. 그런 글을 나도 쓰고 싶었다.


 글을 쓰면서 나는 끊임없는 자기 검열에 부딪친다. 어디까지 보여줘야 하나, 어디까지 드러내 놓아야 할지에 대해 수없이 머뭇거린다. 밑바닥까지 드러내야 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것도 있다. 그런 것은 감동이 덜 할 것이다. 내 인생으로부터 얻어진 성찰을 일반화하여 타인에게 어떻게 공감대를 일으킬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적다면 그것은 한낱 개인의 넋두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은 모든 순간순간이 귀하다. 이것을 알리는 것이 바로 작가가 해야 할 일이다. 작가는 의미 없어 보이는 삶의 작은 부분들마저도 역사적인 것으로 옮겨 놓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덧없이 지나가 버리는 세상의 모든 순간과 사물들을 사람들에게 각인시켜주는 것 그것이 작가의 임무이다.”

 

나탈리 골드버그가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에서 한 말이다. 작가란 모름지기 사소하고 무의미하게 흘러갈 어느 한순간을 붙들어 세상을 주의 깊게 바라보고 낯설게 보는 사람.

 나는 ‘작가는 매일 쓰는 사람이다’는 정의에 기대고 싶어진다. 매일 쓰다 보면 언젠가 좋은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

 

글쓰기는 내가 인생과 협조하는 하나의 방식이었다. 내게 글쓰기란 머리에 생각을 가득 채워 그것을 종이에 옮기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글쓰기가 아닌 타이핑이다. 글쓰기는 종이나 컴퓨터 화면 위에서 자기 자신과 대화하며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을 펼치는 것이다. 그것은 예약도 비용도 필요 없는 대화 치료의 한 방식이다....
  <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 중에서


 작가를 문인이라고 한다. ‘文人’. 가슴에 먹으로 무늬를 새겨 넣은 사람의 모습을 형상화한 글자가 ‘文’이다. 먹물이 채 마르지 않은 촉촉한 글을 가슴에 안고 있는 사람. 나는 이 말이 참 아름답다. 가슴에 문신처럼 새긴 글. 글쓰기가 아무리 나와의 대화라지만, 글을 함부로 쓰면 안 된다는 엄중한 경고로도 들린다.


나는 글을 쓸 때 온전한 나와 만난다.

글을 쓰는 것이 좋다.

글을 가슴에 새기는 사람.

가슴에 무늬를 새기기 위해 글을 쓴다.

누군가에게 따듯한 무늬 하나를 새기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 기억 속의 노래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