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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기헌 Oct 30. 2023

어느 선배와의 낯선 가을밤

서울의 한 대기업에서 사내 아나운서 일을 하고 있는 선배가 안동에 놀러를 왔다. 내일 부산에 행사가 있어서 사회를 보러 가는데, 오랜만에 내 얼굴도 볼겸 안동도 구경하고 싶어서 겸사겸사 온거라고 했다.


반가웠다. 거의 5년만에 보는 듯 했다. 선배는 여전히 당차보였고, 유부녀란게 무색할 정도로 미모는 정점을 찍고 있었다.


호텔을 예약하고 온다길래 나는 기여이 방이 남아도는 우리집에서 머물라고 했다. 어짜피 이야기 보따리를 풀자면 잠은 커녕 밤을 샐 것이 당연해 보이기도 했다. 선배가 또 워낙 말술이라,,


선배는 알았다며 대신 술은 본인이 다 쏠테니 마음껏 먹자고 하신다. 빈 손으로 오기도 뭣하다며 비싼 와인도 두 병이나 사가지고 오셨다. 그렇게 이야기 꽃을 피우며 새벽을 쉬이 맞았다.


선배는 뉴욕대에서 국제정치학을 전공했다. 그래서인지 선배랑 대화할 때면 주로 내가 질문을 하게 된다. 이번 이스라엘 사태와 중동지역의 정치 지형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선배가 생각하는 미국 주도의 세계질서에 관한 헛점도 상세히 들어볼 수 있었다.


현역을 떠난지가 너무 오래됐나, 어떤 주제들에선 선배의 이야기에 논리정연하게 반박을 하는게 힘들었다. 이젠 혼자서 뉴스만 간헐적으로 접하다보니 학문적인 지식도 바닥을 보이나보다. 그래서 나는 가끔 우연찮게 마주하는 이런 시간이 참 뜻깊게 느껴진다. 스승에게 한 수 잘 배우는 느낌, 그런거다.


두어시간을 얼큰히 마시더니 선배는 동네 구경도 할 겸 산책을 하러 나가자고 한다. 밤공기가 차서 내 패딩을 선배에게 둘러주고 그렇게 집을 나섰다. 얘기는 걷는 중에도 계속 이어졌다.


선배가 궁금해하던 나의 이혼 이야기부터 지금 하고 있는 돈까스 가게까지, 선배도 그간 궁금한게 많았나보다. 그리고 우리는 코인 노래방으로 향했다. 이 가을 밤, 선배에게 규현의 <광화문에서>라는 노래를 들려주고 싶어서다. 취했으니까 내가 규현이라 생각하여라,, 하며 노래는 시작이 됐다.


두번째 소절 가사는 이렇게 시작된다. ‘난 모르겠어. 세상 살아간다는 게.’ 이 부분이 어찌나 애석하게 다가오던지. 광화문, 그리고 그 누군가와 함께 걸었던 덕수궁 돌담길은 여전히 그리움으로 남는다. 영원히 그리웁길, 그 그리움이 언제나 내 안에 애틋하게 남아있길, 오늘도 바래본다.


노래방 안에서 춤추고 노래하며 우리는 체력을 다 소진한 채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 2차를 시작하잔다.


밤은 깊어가고 우리는 대학 MT를 온 마냥 즐거움에 들떠 있다. 나는 어쩌면 변하지 않는 것을 찾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많은 친구들과 멀어지고, 이별과 갈등 속에서 버티는 삶이 처절하게 느껴질 때가 많았던 올해가 지나간다. 너무 많은 것이 변했고, 모두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직시할때면 가슴이 무척이나 아프다.


다정한 사람이고 싶다. 앞에 있는 선배처럼, 어렵겠지만 나도 다정한 사람이 되길 소망해본다. 텅 빈 집에 선배로 인해 따스한 온기가 도는 기분이다.


술자리를 위한 배경음악은 선배와 나의 학창시절을 함께했던 H.O.T 메들리로 정했다. ‘함께있는 것이 좋아 널 사랑한거야.’ 선배와 둘이 소리내어 따라 부르며 새벽을 향해간다. 맞다. 함께있는 것이 좋다면, 그걸로 된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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