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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기헌 Dec 13. 2023

어느 사찰에서의 하룻밤

몇일전 서울에 친한 선배가 "야 임기헌~ 너 나랑 사찰에 하루 가서 잘래?"하며 연락이 왔다. 지난번 안동에 와서 하루 신세진 것도 있고, 내가 가끔 사찰에 가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같이 가서 하루 쉬고 오자는 거였다.


사찰이 펜션도 아니고 쉽게 가서 잘수 있냐고 물으니 사회부 취재기자 시절에 연을 맺었던 스님하고 친분이 있다고 했다. 그럼 선배 남편분 하고 가시지,, 했더니 평일에 근처 행사가 있어서 겸사겸사 하루전날 미리가서 사찰서 묵을 예정이라고. 나는 그럼 대신 조건이 있다고 했다. "선배, 나 덮치지 마셈" 하며. 바로 아릿다운 여성 입에서 나오기 힘든 쌍욕을 듣고 그렇게 사찰로 가게 됐다.


산중턱에 위치한 작은 사찰이였다. 고요하고 스산했다. 도착해서 대장(?) 스님께 인사를 드리고, 꽃잎이 떠있는 차 한잔을 같이하며 스님들과 담소를 나눴다. 선배는 역시, 프리랜서 아나운서로 직업을 바꾸더니 입담 하나하나가 구수했다. 속세를 떠난 스님들도 다시 속세로 불러들일 것만 같은 언어의 향변이 이어졌다. 나는 스님들과 사진도 남기고 싶고 풍경도 찍고 싶은데, 선배가 찍는건 좋은데 SNS에는 가급적 올리지 말라며 당부를 했다. 뭇내 아쉽긴 했다.


이후 선배와 나는 스님들이 묵으시는 방과 동떨어진 작은 공간으로 이동을 했다. 사찰에서 입는 진회색의 옷가지들도 준비되어 있었다. 대강 옷을 갈아입고 선배와 나는 수양을 하듯 사찰을 찬찬히 한바퀴 돌았다. 좋았다. 선배 덕에 불현듯 이런 특별한 하루를 맞이할 수 있다니, 감출 수 없는 미소가 돌았다.


방으로 돌아온 나는 이런 분위기에 술이 영 아쉽게 느껴졌다. 그 찰나에 선배가 웬 텀블러를 꺼내더니 집에 있는 양주 한병을 타왔다고 한다. "여기서 이거 마셔도 되요??"하고 묻자 물론 몰래 마셔야 된다고 한다. 역시나 거침이 없는 선배다. 미모와 행동이 첨예하게 따로노는 여자는 살아오며 이 선배밖엔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렇게 우리는 방에 숨어앉아(?) 찻잔에 양주를 부어 꿀꺽꿀꺽 마셨더랬다. 형언할 수 없는 묘한 기분과 기쁨이 온 머릿속을 수놓았다. 이 우주 속 낯선 숲속의 사찰에서, 내가 제일 존경하고 동경하는 선배와 찰나의 순간을 함께하고 있다니.


선배는 묻는다. 요즘은 사는게 좀 나아졌냐고. 나는 답한다. 선배랑 있으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고. 매일매일 똑같은 하루가 너무 지겨운데, 오늘 같은 특별한 하루들이 기억에 난다고. 나는 이야기들을 이어갔다.


"예전에 국무총리께서 기자들을 총리 공관에 초대해주셔서 안동 촌놈인 내가 삼청동 공관에 가서 식사를 다해봤지 뭐에요. 그리고 회사 생활 때 유럽상공회의소와 우리나라 대표 회계법인들 하고 공동주최로 포럼을 했었는데, 끝나고 논현동의 한 한정식 집에서 뒷풀이를 했었어요. 근데 그 자리에서 제일 고생했다며 실무자인 저한테 첫 건배사를 해보라는거에요. 의장님도 계시고 국회의원도 계시고 했는데, 생각지도 못해서 어찌나 챙피했는지,, 할 말이 안떠올라서 '우리의 미래를 위해..?' 그러고 건배를 했더랬죠. 하하~ 또,, MBN아나운서들과 연말 크리스마스 축제 무대에서 꼴갑도 떨어보고, TV에서만 보던 유명 연예인과 같이 식사도 해보고,, 이런 기억들이 참 특별했던 것 같아요."


쭉 나열하다 보니 '나도 참 특별한 하루들이 많았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억이 다채롭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주인 잘못 만난 내 삶에 작은 위안은 줄 수 있을까.


얘기를 한참 듣고 있던 선배는 나한테 다시 재혼을 하라고 조언해 준다. 사랑은 사람을 숨쉬게 한다며, 멋진 명언도 곁들여 준다. 나는 중간에 선배 말을 끊고 깜빡이도 없이 끼어 들었다. "선배 같으면 시장에서 돈까스나 튀기고 있는 나같은 돌싱남 만나고 싶어요? 그것도 그렇고, 저는 이 세상에 선배 같은 여자 한명만 더 있으면 그 사람과 주저없이 할려구요." 선배 입에선 앞서 말한 쌍욕보다 더 거친 언어의 메아리가 이어졌다.


"나는 선배가 좋아요. 같이 있으면 든든하고 따뜻해지는 것 같아요."

"너 또 맛탱이 갔네(ㅋㅋㅋ) 잠이나 자자~"

그렇게 우리의 밤은 깊어갔고, 이른 아침 스님의 마당 비질 소리에 잠에서 깼다. 그만 일어나라는 신호(?) 같은 무언의 빗소리 였다. 일어나서 짐을 꾸린 우리는 사찰밥을 정성껏 준비해주신 스님들의 호의에 쓰라린 속을 부여잡고 아침을 먹은 뒤 정중히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사찰을 나섰다. 건조한 일상에 불현듯 찾아온 꿈만 같았던 하루의 속삭임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매일이 특별할 필요는 없을것 같다. 그러면 그 특별함도 평범해져버릴테니 말이다. 다만 가끔 찾아오는 특별함은 남루한 삶에 분명 큰 위로가 되는 것만 같다. 선배랑 보낸 사찰에서의 귀한 하룻밤,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기억할 수 있는 특별함이 하나 더 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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