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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기헌 Dec 24. 2023

일본에서 떠올린 황진이

누나가 이번 일본 여행 때 너무 많이 먹었다고 주말 아침부터 헬스장을 갔다며 사진을 찍어 보내왔다. "아직 예쁘지?ㅋㅋ"하며. 나는 "사람들 다 보는데 레깅스만 입고 꼴깝 떨지 말고 겉에 반바지라도 좀 입지?"하고 답을 했다. 그랬더니 아침이라 사람도 없고, 운동할 땐 레깅스가 편하긴 하단다.


일본 여행에서는 조카들이 무슨 크롭티(?)라고 해서 배가 훤히 드러나는 딱 달라붙는 티셔츠를 입고 다녔더랬다. 요즘 유행이라며. 나는 보자마자 또 한소리를 했다. 그랬더니 삼촌은 요즘 유행도 모르냐며, 되려 핀잔을 들었다.


모르겠다. 남들이야 뭐 훌러덩 벗건말건 상관할 바 아니지만, 가족의 노출에 대해선 나는 여전히 보수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 흠칫 눈길이 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뭇 여성들은 그 눈길과 관심을 즐기기도 하고, 사진으로 치환해 스스로 과시하기도 한다. 본인이 드러내놓고, 쳐다보는 사람이 '시선강간' 한다며 본질을 호도하는 경우도 빈번히 볼 수 있다.


서정주 시인이 <격포우중(格浦雨中)>에서 노래했던 '떠돌이 창녀 시인 황진이의 슬픈 사타구니'의 노출과는 그 결이 사뭇 다른 시대에 살고 있단 생각도 든다.


제 가치관이 무릇 익어가는 사춘기 한 가운데에 있는 조카들을 보며, 나는 결혼 만큼은 다신 안해야겠다는 생각을 다시한번 다졌다. 참다참다 유니버셜 스튜디오에서 폭발한 누나와 울며 도망치는 큰 조카를 멀찍이서 바라보며, 떠돌이 창녀가 된 황진이의 어린 시절을 그려보기도 했다.


누나는 그런다. 이렇게 낳았고, 내 자식이니까 사랑하며 키울 수 밖에 없는데, 다시한번 선택할 수 있다면 결혼하고, 특히 애낳고 키우는건 절대 하고 싶지가 않단다. 엄마는 옆에서 애 키우는게 다 그런거라며 또 누나를 독려한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 엄마의 인내는 어디까지일까, 싶은. 그 옛날 보릿고개 시절, 말썽만 피우던 나를 보며, 훌쩍 커서도 말 안듣고 그토록 말리던 이혼까지 해가며 혼자 살고 있는 나를 보면 얼마나 속상할까.


젊은 날 누나는 스튜디어스 생활을 계속 하고, 나는 기자 생활을 계속 했다면 우리 가족은 지금보다 조금 더 나은 삶을 살고 있었을까. 그랬다면 아버지한테도 암이라는 큰병이 찾아오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 계셨을까.


나는 일본에서의 마지막 밤 얼큰히 취해 엄마와 누나 앞에서 앞으로의 계획을 말해줬다. 큰 틀은 그런거다. 엄마와 누나, 그리고 조카들의 삶이 지루하지 않게 해주겠다고. 돈과는 별개로 나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말이다.


이번에 여러곳을 둘러보며 일부러 외국 사람들과 영어 대화를 많이 했더랬다. 가족들은 내가 영어 하는 모습을 볼 기회가 없었으니, 이럴 때라도 한번 엄마한테 어리광 피우듯 자랑하고 싶었다. 조카들은 허름한 가게에서 돈까스만 튀기던 삼촌이 이런 모습이 있었냐며 인정하긴 싫지만 멋있다는 말을 기여이 꺼내준다.


그리고 분위기가 사뭇 달아오르는 것 같아 나는 마지막밤 피날레를 장식하기 위해 어느 영화에서 본 이 말을 덧붙혔다. "엄마, 아름다운 것들은 관심을 바라지 않아. 그래서 난 계속 혼자 살거야.ㅋㅋㅋ"


"미친놈" 엄마는 결국 또 뒷목을 잡고 말았다.


잠들며 생각했다. 어떤 아름다운 순간이 오면 방해받거나 방해하고 싶지 않다는 것. 그냥 그 순간 속에 머물고 싶지. 오랜 세월, 가족들과 함께 한 모든 순간이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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