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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기헌 Dec 28. 2023

사람들은 뭐가 저렇게 좋을까

해방 이후 언제나 그랬듯 우리는 반으로 갈라져 싸운다. 2023년이 저물어 가는 오늘도, 사람들은 또 싸운다. 온 국민이 사랑한 유명 배우가 죽어도 어떻게든 편을 갈라 싸운다. 천안함, 세월호, 이태원 참사 후에도 우리 사회는 위로보단 갈등만이 잔혹하게 남았다.


우리는 잘잘못을 따져 토론하며 해소하려는 건설적인 싸움을 지향하지 않는다. 나와 반대쪽에 서있는 이들은 무조건 적으로 간주하는, 그 뿐이다. 해방 이후 소련과 미국 군정이 나라를 둘로 쪼개 지배하던 그 순간부터 이상한 좌우 이념이 우리 민족을 다신 돌아올 수 없는 루비콘 강 양뭍으로 밀어냈는지도 모르겠다.


지겹다는 말도 아깝다. 세계적으로 저명한 인류학자들이 예견하길, 인구 감소로 멸망 할 나라 최선두에 서있는 대한민국이지만 그 누구도 아랑곳 하지 않는다. 나라가 멸망을 하건말건 우리는 내 아이 우선주의를 외치는 ‘맘충’을 중심으로 편을 갈라 싸워야 하는 모양이다.


그 누군가가 선의로 기부를 해도, 목숨바쳐 나라를 구해도, 그들의 신의를 의심하며 또 싸운다.


한편에선 연말이 되니 서로가 SNS에서 ‘과시의 끝’을 보여주려 난리다. 모임도 많고, 게다가 화려하기까지 하다. 그들에게서 나는 ’피로의 끝‘을 느낀다.


언제쯤 끝이날까.


내 사진에 ’좋아요‘를 누르지 않으면 소통이 없다는 핑계로 숙청하듯 친구나 팔로우를 끊겠다며 대놓고 으름장을 놓는 그들의 심리는 어디에서 기인하는 걸까. 그러고 나면 정말 후련하고 행복할까.


이탈리아 로마의 공동묘지 입구에는 ’호디에 미히, 크라스 티비‘라는 라틴어 문장이 새겨져 있다. ’오늘은 나, 내일은 너‘라는 뜻이다. 오늘은 내 차례, 내일은 당신 차례, 즉 죽음은 누구도 피해갈 수 없다는 얘기다.


그런데 대한민국 만큼은 예외인 것만 같다. ‘나는 아니겠지’, ‘나만 아니면 돼‘ 라는 생각으로 중무장 한 견고한 이들이 많아 보여서다.


나만 제외하고 모두가 평화롭고, 자유롭고, 행복해 보이던 때가 있었다. 삶의 번민을 도외시 한 미소들은 닮고 싶을 정도였다. 그 모습을 보며 우리 모두는 도움이 필요한 존재란 걸 나는 그때 알았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착각이였다. 도움 따위는 필요조차도 없었다. 그래도 살아야 한다며, 작은 위로의 한마디 조차 이토록 어색한 사회인지 나는 미쳐 몰랐다. 해소할 방법이 있긴하다. 삶과 죽음을 맞바꿔보면 알 수 있다. 가깝게는 오늘 배우 이선균이 그랬듯, 혹은 돌아가신 제 부모들이 그렇듯, 사람들은 누군가가 죽고나면 그제서야 각성하듯 위로를 건넨다. 살아있을 때의 위로는 사치인가 보다.


해서 나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살아생전 행복한거도 좋지만 부디 아파봤으면 좋겠다라는 단세포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 딱 한번씩만, 그래봤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도 보고, 죽음의 문턱에서 기댈 곳도 없는, 그런 상황도 맞닥뜨려 봤으면 좋겠다는 바램이다.


3년전 죽기 위해 갔던 제주도 애월리에서 202번 버스를 타고 가며 그런 생각을 했더랬다. ’사람들은 뭐가 저렇게 좋을까‘ 하는.


오늘도 공직에 있는 친한 선배와 술한잔 하고 돌아오는 길에 거리를 수놓은 사람들을 보며 그런 생각을 다시 하게 됐다. ’사람들은 정말이지, 뭐가 저렇게 좋을까‘ 하는.


하늘나라로 간 나의 아저씨는 이제 편안함에 이르렀을까. 온 세상이 본인만 빼놓고 모두 행복해 보였을 그 마음, 나는 감히 헤아리고 싶다.


우리 사는 세상은 어쩌다 이 지경이 되버린 걸까. 이젠 감히 추모도 못하게 된 것만 같아 참 슬프다. 어떻게 나아질 것 같지도 않다.


글은 써서 뭐할까.

서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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