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를 수식하는 단어로는 소설가, 그리고 살인자의 기억법 같은 것들이 있다. 대중에게 깊게 설명을 안해도 그 사람을 수식하는 단어 하나로 때로는 그 사람의 필모그래피 전체를 대변할 수 있다.
오늘 안동에 강연을 오신 김영하 작가의 언어를 글이 아닌 귀로 들으며 그간의 수식으로만 인지되던 그 모든 걸 또한번 넘어서게 됐다. 명료하고, 위트가 넘쳤다. 과하지 않고, 절제 됐으며 수많은 작가의 책들과 문구를 인용하며 관객들을 집중시켰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를 알기 쉽게 요약했으며, 총•균•쇠는 해학을 가미해 관객의 또다른 관심을 유도하기도 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뭐였을까, 싶은. 과거 몇몇 서울의 대학교 강연에 나섰던 나는 학생들에게 어떻게 비춰졌을까, 싶은. 얼마나 같잖고, 얼마나 유치 했을까, 싶은거다. 유려한 말솜씨와 지식은 커녕, 긴장하는 바람에 관객들과 호흡 할 여유조차도 없었으니 말이다.
모두 실력 탓 인거다. 지식의 결여와 허세의 과잉이 결합 돼 준비조차 안된 상태에서 강연을 했다는게 부아가 치미는 기분을 들게 만든다.
부단히 공부하고 학습 할 일이다. 다늦게 지방에 터를 잡은 나는, 핑계를 늘여놓을게 아니라 대도시의 그들보다 몇곱절은 더 노력을 기울었어야 했다.
이젠 그들과의 차이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벌어진 기분이 든다. 당장 먹고 살겠다고 얼어죽을 돈까스나 튀기고 별안간 부업에나 혈안이 되어 있으니 미로에 갇혀 출구를 잃은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나는, 많은 꿈이 있었다. 이뤄낼 수 없을것만 같은 꿈을 이뤄냈을 때는, 그 순간이 꿈만 같았다.
이젠 아무것도 할 수가 없을것 같아 조금은 슬프다. 오늘 김영하 작가의 모습을 대척점에서 그려보며, 오늘 꾸는 슬픈 꿈은 꿈이 아닌 현실이란 걸 직감하게 됐다.
또다른 꿈안에선 묘비명을 쓴다. “쓸모있는 사람이 되려 애썼다.” 이내 나를 수식해 줄 한 문장이 있다면, 이거면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