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임기헌 Sep 07. 2022

아버지 납골당을 다녀오며

올해부터 우리집도 명절 제사는 지내지 않기로 했다. 엄마와 서울 삼촌과 고모네와 모두 그렇게 합의를 봤다. 시대가 바꼈으니 우리도 그 순리를 따르는게 맞다고 생각해 그렇게 결정을 하게 됐다.


해서 엄마와 둘이서 아버지 납골당을 미리 다녀왔다. 음식물 반입이 원칙적으로 금지된 터라 차린 것도 조촐하다. 아버지 좋아하시는 소주와 떡과 과일 몇조각이 전부다. 오랜만에 납골당을 찾은 엄마는 생각이 많아 보였다. 금새 또 울음을 터뜨릴거 같아 빨리 돌아가자고 반강제로 모시고 나왔다.


돌아오며 살아생전의 아버지를 생각해 본다. 나는 아버지의 눈물을 평생  2 봤다. 최전방에서 군생활을 하다가 100일만에 휴가를 나왔는데 다시 복귀하는 , 버스에서다.


"기헌아, 아빠랑 악수 한번 하자. 돌아가서도 늘 씩씩하게 군생활 잘해야 한다."하며. 그리고 뒤돌아서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아버지 모습을 바라보게 됐다.


이 후엔 서울 아산병원 암병동에서 아버지의 췌장암 말기 소식을 전해듣고 나서다. 나는 보호자 자격으로 의사 선생님께 아버지가 췌장암 말기며, 6개월 정도 남았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그리고 화장실에서 30분 가량 눈물을 다 쏟고 아버지 병실로 갔다. 그냥, 그냥,, 차마 숨길 수가 없었다. 아버지를 보는 순간 또 눈물이 쏟아졌고, "아빠 췌장암 말기래"하며 말을 건넸다.


아버지는 처음엔 무덤덤하게 들었지만, 이내 나랑 휴게실에 바람 좀 쐬러 가자고 했다. 그러더니 서럽게 우신다. 땀을 닦을 용도로 목덜미에 두르고 있던 수건을 얼굴에 묻더니 눈물을 하염없이 닦으셨다. 그게 마지막이였다. 아버지의 눈물을 접한 건.


아버지 없는 명절을 맞이하는게 횟수로 이젠 9년차가 됐다. 그간 꿈에도 많이 나왔지만 몇년전부터는 꿈에서조차 볼 수 없게 됐다.


친구네들 아버지는 대부분 손자손녀를 보며 할아버지가 되어 가고 있는데, 우리 아버지는 50대에서 정확히 멈췄다. 나는 어느샌가 우리 아버지 나이대를 향해 격렬히 달려가고 있는데.


지금도 나는 울컥 할 때가 많다. 술자리에서 다양한 아버지 상들을 얘기할 때면, 나는 우리 아버지가 사무치게 그립다. 혼자 잠을 자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손님이 지나간 자리에 음식물이 널브러져 있는 테이블을 닦다가도, 나는 아버지를 생각한다.


만날 때 마다 "영원히 사랑하자"라며 호기롭게 시작하는 뭇 연인들의 인스턴트 사랑과는 비교 대상이 아니다. 죽어서도 잊지 못하는, 그런 사랑인거다.


내가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까. 이혼남에 나이는 41살을 지나가고 있으니, 현실적으로는 무척 어렵게 됐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를 생각만 할 수 있지,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릴 수는 없게 됐다. 그래서 더 아프다.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릴  있다면,  아버지를 떠나보낸 마음이 이토록 비통하지는 않았을 만 같다.


해서 아이를 품에 안은 세상 모든 아버지들이 부럽고, 때론 낯설다. 우리 아버지도 1982년 12월 31일, 이 못난 아들이 태어나던 날, 세상 모든 아버지와 같은 마음이였을 것 같다.

작가의 이전글 인플루언서의 삶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