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선약수(上善若水).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경구인데, 모든 선한 것은 물과 같다는 뜻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자성어기도 하지만,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 등 유명 정치인들도 많이 인용하는 터라 이제는 꽤나 널리 알려져 있다.
과거에 서울의 한 호텔에서 전 외환은행장과 식사를 한번 같이 한 적이 있다. 전직 장관도 지내신 분인데, 체구가 작으신데도 불구하고 풍기는 아우라는 대단했던 기억이 있다. 그분 카톡 프로필 글귀에도 ‘상선약수’라는 문구가 있어 괜한 친근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여쭤봤다. 부와 권력을 다 이루셨는데 행복하신지. 그런데 아니란다. 하루 모든 일과가 끝나고 집에 들어가면 그렇게 공허할 수가 없단다. 우울증이 찾아올 만큼 하루의 끝은 늘 그렇게 허무하다고 하신다.
어제는 새벽녘에 한 후배가 전화를 해왔다. 당연지사 얼큰히 취해서였다. 서울에는 어제 눈이 왔다며, 이제 올해도 한달밖에 안남았다는 세월에 대한 푸념을 늘여놓기 시작했다. 나보고는 자유롭게 일도 하고, 책도 잘 팔리는거 같다며 너무 부럽단다. 특히 해의 마지막 날은 내 생일이란 걸 늘 기억하고 있다며 그 새벽에 선물을 미리 보내온다.
“그래, 고맙다. 얼른 들어가서 자.” 별다른 군더더기 말없이 나는 건조한 인사만 전한 채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우리 사는 세상이 참 이질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비분강개 함은 물론이고, 때론 참 경박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많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실재하는 것인지 의문이 들기도 하고, 뫼비우스 띠 처럼 요란하게 꼬인 사람간의 실타래는 거짓이 거짓을 낳는 악순환을 반복하고 있는 것만 같다.
스웨덴인들이 올해 가장 좋아했던 책으로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I may be wrong)>라는 책이 선정 됐다고 한다. 저마다 본인이 맞다고 목청 껏 소리치는 우리네들이 이 책을 통해 한번 생각해봤으면 좋을 것만 같다.
마지막 남은 달력 한장을 바라보고 있어도 이젠 아무런 생각이 들질 않는다. 보지도 않는 TV와 읽다 만 책들도 작년 12월의 상황과 매한가지로 똑같다. 만남과 이별은 반복됐고, 나는 또 현실을 피해 도피나 할 생각을 하고 있다. 42살을 앞두고 있어도 쫄보나 다름없는 꼴이다.
작년에도 그랬다. 그래서 하루 아침에 준비를 해서 제주도로 떠나 한달간 머물렀더랬다. 원래는 일본 삿포로에서 한달간 더 체류할 계획이였는데, 코로나로 봉쇄가 되는 바람에 계획이 무산 됐다. 계획대로였다면 책 제목이 바뀔 법도 했겠다.
쳇바퀴도 이런 쳇바퀴가 있을까. 얼굴살에 주름이 느는 것과 죽음의 시간이 점점 다가오는 것 빼곤 모든게 똑같아졌고, 나는 또 덩그런히 혼자 남았다.
아무것도 아닌게 되버린 채 볼품없는 중년에 접어든 나는 어느 정도의 속도로 살아가면 좋을까.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물의 속도 정도면 괜찮을까.
상선약수(上善若水). 선한 물 처럼, 노을지는 하늘이 참 곱다. 12월의 첫 아침이 이렇게 밝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