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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기헌 Jan 27. 2023

암과 싸우는 사람들

서울의 한 선배가 간암3기 진단을 받았다고 한다. 나이는 마흔 중반. 암도 암이지만 앞으로 있을 무수한 검사와 수술, 항암 치료 등 병원 안에서 서서히 죽어갈 생각을 하니 하늘이 무너지는거 같다고 한다.


그래 맞다. 3~4기 정도면 고통스럽게 죽어간다는 말이 냉정한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희망을 가득담은 책이나 왜곡된 통계 자료들은 생존률이 높아졌다고 말하지만, 나는 4기 암환자 중에 완치된 이를 주위에서 본 적이 없다. 뼈만 앙상하게 남겨둔 채 모든 장기와 살을 갉아먹고 1~2년 내로 끝내 생명을 앗아가는 것이다.


나는 과거 아버지가 췌장암 말기 선고를 받는 순간 그 자리에서 다리가 풀려 한참이나 일어나질 못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던 그 광경을 내가 쉬이 따라하는 꼴이 되버렸다. 그렇게 서울아산병원 암병동에서 아버지의 병원 생활이 시작됐고, 병동 안의 여러 환우와 가족들과도 나는 제법 친해지게 되었다.


동병상련 이랄까. 그곳은 전국의 말기 암환자들이 모두 모여있는 곳이였다. 쉽게 말해 곧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다. 툭하면 통곡 소리가 빗발쳤고, 우리는 서로를 애틋하게 위로해주곤 했었다. 수술이 잘되서 퇴원을 한 환우분들도 계셨는데, 두어달만에 전이가 되서 결국 사망하셨다는 소식도 곧잘 들을 수 있었다. 세상 모든 슬픔이 집결 된 장소이기도 하다.


그즈음 내 나이는 33살 되던 해였던 것 같다. 다니던 언론사에서는 일꾼 격인 대리 직급 정도 됐었는데, 우리 아버지는 병원에서 간호사 분들을 비롯해 같은 병동 사람들에게 "우리 아들 매일경제/MBN 본사 다녀요"하며 늘상 자랑을 했다고 한다. 나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 참 행복했다. 내가 우리 아버지의 자랑이 될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며.


그래서 생각을 해봤다. 살아갈 날이 얼마남지 않은 아버지한테 내가 무얼 해줄수 있을지. 그러다 아버지가 당시 토론 프로그램을 즐겨보시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서 나는 망설임 없이 시사토론 대표논객으로 지원을 했다. 이력서는 통과가 됐고, 몇일뒤 여의도로 가서 담당PD님과 면접도 봤더랬다. 나는 당시 여당 편에 섰었고, 상대는 사법고시 준비생인데 야당 편에서 서로 논쟁을 했었다. 생방송 날이 다가왔고, 나는 KBS스튜디오로 가서 여러 국회의원, 장관 분들과 인사를 나누고 토론에 참여를 했다.


딱 1명, 나는 아버지한테만 사전에 얘기를 했었다. "아빠, 나 오늘 생방송 시사토론에 나오니까 이따가 TV 꼭 켜봐!"하며. 방송은 무사히 끝났고, 다음날 곳곳에서 연락이 왔다. TV 잘 봤다며. 분명 아버지한테만 말을 했는데, 아버지는 지인분들께 죄다 연락을 한 것이였다. 실없는 웃음이 나왔지만, 아버지가 좋아하시니 나도 그저 좋았다.


그렇게 1년여의 시간이 흘렀고, 보험 적용이 안되는 병원비 덕에 나는 퇴직금까지 모두 당겨쓰고 신용카드는 연체가 누적돼 수천만원의 빚더미에 쌓이게 됐다. 뭐 상관 없었다. 살아있는 내가 열심히 벌어서 다 감당하면 될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병원 의사선생님은 이제 보름 정도 남았으니 준비를 하라고 하셨다. 나는 아버지를 모실 납골당을 여러군데 알아봤고 장례식장도 둘러보곤 했었다. 눈물이 바다가 된다는 말을 나는 그때 처음으로 실감할 수 있었다. 살아있는 우리 아버지 묻을 곳을 천하의 몹쓸 자식인 내가 알아보고 있는 것이였다.


마지막 일주일. 아버지가 투병한 시간들을 같이 보내며 나는 그 이야기들을 모아 어느 의학 매거진에 글로 써서 보냈더랬다. 이 후 그 매거진 편집장이 연락이 와서는 소정의 원고료까지 보내주며 1면에 대문짝만한 크기로 내 글을 실어 주셨다. 구구절절 너무 감동 받았다고, 좋은 글 보내줘서 되려 감사하다며 고마워 하셨다.


나는 병원 앞 서점에서 그 매거진을 사들고 아버지한테 갔다. 중환자실에서 인공호흡기에 의지한 채, 이제 눈도 못뜨는 아버지께 말이다. 마지막 자랑거리를 가지고 왔는데, 아버지 좋아하시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딱 한번만 더 보고 싶었는데, 아버지는 그렇게 몇일동안 인공호흡기에 의지하시다가 끝내 돌아가셨다. 침대 베개 맡에는 매거진이 놓인 채, 그렇게 평온하게 가셨다.


병실 바닥에 엎드려 우리 가족은 소리내어 울었고, 봄날의 햇살은 창틈으로 들어와 우리 아버지를 은은하게 비추었다. 아마도 우리 아버지를 천국으로 안내하는 길잡이 같은 햇살이였을거다.


아버지를 그렇게 보내고, 나는 한동안 병원에 대한 트라우마 같은 것이 생겼다. 특히나 암병동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봐와서 그 농도는 짙어졌다.


아버지 장례를 치른 후 다시 서울로 돌아온 나는, 작은 선물과 꽃을 준비해 아산병원을 찾았더랬다. 그리고 간호사 분들께 우리 아버지 돌봐주셔서 너무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했다.


여전히 모르겠다. 살아간다는게 무슨 의미인지. 오늘같은 금요일의 설레임이 다 무슨 소용일까. 아픈 사람을 알아보는 건 더 아픈 사람이라고 했는데, 앞서말한 그 선배의 아픔을 잘 헤아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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