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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기헌 Mar 12. 2023

봄의 고속도로

안동에서 원주간 거리를 고속도로를 타고 달리면 대략 1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왕복거리를 오가는 동안 음악은 30곡 정도를 들을 수 있다. 중간에 휴게소가 하나 있는데 차 시트를 뒤로 끝까지 젖히고 썬루프를 열면 하늘의 무수한 별들도 볼수가 있다. 이따금씩 내 마음의 불순물을 덜어내는 유일한 방법이다.


가끔은 영덕으로 방향을 틀어 바닷가 옆 작은 민박집에서 1박을 하고 아침에 동트인 바다를 바라보며 라면을 한그릇 먹고 올 때도 있다.


이런 습관은 아마도 독일에 갔을때 차를 렌트해 아우토반을 달린 기억에서 비롯되었던 것 같다. 속도제한 없는 전세계 유일한 도로 아우토반에서 잡생각 따위는 스며들 틈이 없었기 때문이다.


곳곳마다 설치된 신호등에서, 학교 앞을 지날때는 사람이 뛰는 속도보다도 느린 30km 속도제한에서, 이런 도시 속에서는 마음속 켜켜히 쌓인 심폐물을 해소할 길이 없었다.


우울증도 아니다. 그렇다고 마음이 편하거나 즐거운것도 아니다. 서늘한 바람이 불면 첫사랑이 생각나는 것 또한 아니다. 맹탕 같은 하루하루에 의미를 찾지 못하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열심히 운동을 하거나, 취미로 악기를 배우거나, 혹은 지인들과 도란도란 모여 함박웃음을 지어도 그 의미를 찾을 길이 없다.


몇일전 어렵사리 고백을 건네온 누군가의 떨리는 목소리도 큰 울림이 일지를 않는다. 여자로써 자존심도 뭉개고 엄청난 고민을 했을텐데, 나는 이렇게 또 죄인이 되버린 것만 같다.


본능인 성욕, 식욕도 분명 전과 같지 않다. 답답한 마음에 통화를 하고싶어 폰을 들어도 3,000여명이나 되는 주소록 중에 편하게 전화할 단 한명이 없다. 42살의 내 처지를 극명하게 나타내 주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내 소망이 뭐냐고 묻는다면, 오늘밤 잠든 뒤 깨지 않는거다. 부자가 되는것도 아니고, 불멸을 꿈꾸며 건강한 삶 따위를 바라지도 않는다. 인생의 선배들께나 가족들에게는 무척이나 염치없고 송구한 말씀이지만, 이즈음되니 굳이 몰라도 되는 너무나 많은걸 헤집으며 살았다는 상념에 이쯤하면 됐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특히나 사랑, 만남, 이별, 죽음에서의 상흔은 굳이 몰라도 됐던 것들이였다.


‘내일도 눈뜨면 산송장 마냥 아무 의미없이 일을 하고 뭔가 조금 나아질거란 변화를 기대하며 하루를 살아가겠지. 좋은 글도 보고 마음의 소리를 들으며 무료한 하루에 희망을 엿보기도 하겠지. 퍽이나, 나잇살만 늘어가고 하릴없이 시간만 좀먹는 걸 빤히 알면서도 다른 방도가 없으니 매일을 똑같게, 그렇게만 나는 또 살아가겠지.’


볼품없이 늙어가는거 보다 나는 지금이 딱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앞서말한 내 소망, 잠에서 깨지 않았으면 하는 간절한 바램이 이뤄지는 순간 말이다. 너무도 고요하게, 그런 마지막이라면 그제서야 행복을 만끽할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일요일밤 11시30분. 집앞에 도착을 했고 출발할때 틀었던 플레이리스트의 첫곡 로이킴의 <그때로 돌아가>란 곡이 한바퀴를 돌아 다시 흘러나온다. ‘나는 널 사랑했고/ 너도 날 사랑한다 했잖아.’ 하는 애잔한 가사가 함께 흘러나온다.


젊은 시절의 그 푸성귀 사랑을 생각해 본다. 차 시동을 찬찬히 끈다. 2시간 동안 고속도로 위에 멈춰있던 시간들은 다시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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