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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기헌 Mar 17. 2023

몇센티미터의 속도로 살아가야 될까

춥지도 않은데 송글송글 맺힌 식은 땀, 그리고 빨리빨리 매듭을 지으려는 조바심, 유난히 고된 하루였다. 밀려드는 음식 주문에 왠지모를 짜증과 한숨이 반복되는 날이기도 했다. 마감이 얼마남지 않은 책 원고에 대한 스트레스는 극에 달해가고, 뼈가 으스러진 발목은 한달째 나을 낌새가 보이질 않는다.


밤 12시. 달 표면 고요의 바다처럼 숨소리 조차 들리지 않는 재래시장의 한 가운데. 어느덧 장막이 닫히고, 화려한 스포트라이트가 빛을 다하며 무대는 어둠속으로 스며든다. 하루의 끝에서 모든 간판 불을 내리고, 나는 내 가게라는 무대를 뒤로한 채 장막뒤로 사라진다.


언젠가 그런 생각을 했다. 함께 있을 때는 미쳐 몰랐던 생각. 뒷모습이 참 예뻤다는 걸, 가는 널 바라보며 그제서야 알게 된 그 뒷모습. 불꺼진 내 가게의 뒷모습도 오늘은 참 낯설게 느껴진다. 마치 늙고 병들어 생명력을 다해가는 것만 같은 진한 어둠이다.


'사라져버리는 것을 사랑하는 일은 얼마나 잔인하고 덧없는지. 사랑하기 때문에 사라지는 것인지, 사라지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인지.'


그제 서울의 한 선배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부고를 전해 들었다. 올해만 벌써 2번째 전해듣는 부고 소식이다. 불과 5년전만 해도 누군가의 죽음은 온 세상의 슬픔처럼 감정 이입이 됐지만, 지금은 소란하며 자연스런 일상의 하나즈음으로 취급되어 버린 기분이 든다.


그렇게도 멀게만 느껴졌던 죽음이 나의 곁에도 불과 몇 센티미터만을 남겨두고 다가오고 있음을 잘 알수 있기 때문이다. 하루사이로 반복되는 해질녘 노을과 동틀녘 노을의 간극은 몇 센티미터 밖에 되지않는 삶과 죽음 사이의 그 무엇과도 같음을 느낄수도 있다.


내 생명이 다하는 날, 나는 그토록 좋아하는 짜장면을 마지막으로 생각할 수 있을까. 누군가 커튼콜을 외치며 나의 마지막 무대를 바란다면, 나는 내 살아온 세상에 어떤 말을 남기면 좋을까.


아마도 미련이 남는듯한 앵콜이나 흔적을 남기려는 유서 따위는 없을거다. 나는 그렇게 장막뒤로 조용히 사라지며 붉은 노을 너머를 훨훨 날아가는거다. 가서, 천상병 시인의 말대로 이 세상 조금은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는거다. 그러니 어떠한 그림자도 남기지 않고 그렇게 고요히 떠나는거다.


‘죽은 사람들 틈에서는 내가 제일 행복한 사람이길, 더불어 세상 살며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행복이 만개하는 기분을 그 틈에서는 만끽하길. 필연 그들이 사는 세상은 조금더 계몽된 사회이길, 그리고 꽃향기도 가득하길.’


또각또각. 초속 5센티미터의 속도로 나는 오늘 하루의 끝을 향해 걸어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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