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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기헌 May 20. 2023

세계여행이 남기는 것

반찬거리를 사러 시장 마실을 나갔더랬다. 언제나 그랬듯 시장통은 어르신들로 붐볐고, 버스정류장 부근에서는 한 외국인 커플이 당황한 모습으로 버스시간표를 훑어보고 있었다. 시간표는 빈틈없이 모두 한국어로 표기되어 있었고, 오고가는 버스를 한 두대씩 계속 놓쳐가며 그들은 갈 곳을 잃는 듯 했다.


'도와줘야 하나..‘ 어디 나서기를 참 싫어하는 나는 한참이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고민이 들면서도 '누군가 도와주겠지 뭐'하며 그냥 지나쳐 갔더랬다. 그런데 주변엔 어르신들 뿐이 보이질 않아 할 수 없이 발길을 돌려 그들에게 다시 다가갔다.


그리고 영어로 말을 걸었다.

"혹시 영어 할 줄 아세요? 뭐 좀 도와드릴까요?"

"네. 저희 봉정사라는 사찰을 가려고 하는데, 버스를 못 찾겠어요."

"네, 잠시만요.(나는 봉정사로 가는 버스 번호를 확인 한 뒤) 00번 타시면 되세요. 그리고 요금은 아마 2000원 정도 될거에요. 기사분께 2000원 먼저 드리고, 금액이 남으면 알아서 돌려주실거에요."

"감사합니다."

"네, 근데 어디서 오셨어요?"

"영국에서요. 한국에 여행을 왔는데, 한국적인 곳을 와보고 싶어서 이곳에 오게 됐어요."

"그러시군요. 저도 과거에 영국 런던에 두번 정도 여행을 갔었어요. 국회의사당(빅벤)도 갔었고, 타워브릿지도 갔었더랍니다. 멋진 나라에서 오셨네요."

"아! 영광이네요. 번역기도 안먹히고 물어볼 곳도 없어서 너무 힘들었는데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네.(하하) 그럼 즐거운 여행 되시구요. 시간표 보니 버스는 곧 도착할거에요.“


그렇게 간단한 대화를 나누고 우리는 헤어졌다. 돌아오는 길에 뭔가 뿌듯한(?) 괜한 성취감 같은 것이 들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데, 그 이방인들에게는 훗날 한국의 기억속에 이 짧은 장면이 떠오를지도 모를 일이다.


나도 그랬던 것 같다. 에펠탑, 콜로세움, 루브르 박물관, 교황청, 도쿄타워 같은 세계적인 명소가 생각나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 사람들의 친절한 미소가 기억에 더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호주에서 대학교를 다닐 때 하교길 버스안에서 깜빡 잠이들어 내릴 곳을 지나친 적이 있었다. 한참이나 떨어진 정류소에서 내린 나는 어찌나 당황했는지 모르겠다. 그때 알프스 소녀처럼 화사한 교복을 입은 한 현지 여고생이 나에게 다가와 사는 곳 주소가 어디냐며 물어왔다. 그러더니 본인 가방에서 책 모퉁이를 찢어 상세하게 가는 방법을 적어줬다. 20년 가까이 된 그 쪽지를 여전히 보관하고 있는 나는, 무엇보다도 그 소녀의 미소가 아늑하게 기억이 난다.


'비루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직 있을까'하며 골몰하던 나는, 오늘만큼은 하나의 일을 해낸 셈이 됐다. 마치 20년전 호주의 그 소녀가 된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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