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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기헌 Jul 28. 2022

쓸모를 다해 갈 무렵

쓸모를 다해  , 그즈음에야 가족이 시야에 들어온다. 아니다, 그러고 보니 가족은 언제나  자리였는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살아가며 친구와 연인에 대한 신뢰가 무척이나 강하다. 의리와 사랑으로 포장 된 이 관계는, 격정적인 사건이 생기기 전까지는 굳건하다.


SNS만 봐도 그러하다. 주름으로 얼룩진 부모 사진을 SNS에 게시하는 젊은이들을 본적 있는가. 행여나 젊고 예쁜 본인의 이미지에 먹칠이 될까봐 부모 따위는 뒷전이다. 그 자리는 오롯이 허우대 멀쩡한 친구들이 메꿔준다.


그러다 격정적인 사건이 생기면 부모의 품으로 돌아가곤 한다. 견딜 수 없을만큼 아프거나, 생사의 기로에 있을 때다. 내가 아프면 그 아무리 친한친구도 생업까지 포기하고 들여다보진 않는다. 그런데 가족은 생업 따위는 뒷전이다. 자식, 혹은 부모가 먼저가 된다.


이 고유불변의 차이를 사람들은 잊고 산다. 삶이 온통 근시안적이다. 바로 앞의 유불리만 따지며 살아간다. 지금 당장은 친구, 혹은 연인밖에 눈에 들어오질 않으니 영원한 의리와 사랑을 약속한다. 그 개념 속에 있는 우리는 마음이 든든해 진다. 이 개념이 오류 덩어리 였다는 걸 알게 되는 시간은 찰나 만큼이나 짧지만.


그렇다고 가족만을 위시한 1인 시대를 지향하는 건 아니다. 맹목적인 1인의 삶은 거리를 두었으면 좋겠다. 유명인들이 화려한 1인의 삶을 추구하니, 근시안적으로 따라하는 행태 같은 것들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요즘은 멀쩡한 남녀들을 찾기 어려운 건 사실이다. 그래도 어딘가에는 있기 마련이다. 그 어딘가에 꽁꽁 숨어 있는 서로를 우리는 '운명'이라 부른다.


나는 비록 그 운명들을 못알아보고 보기좋게 이별을 맞이했지만, 그 누군가들은 나처럼 오점을 남기지 말고 어렵게 찾아온 운명을 잘 받아들여 온전한 가정을 꾸려나갔으면 좋겠다. 그러면 죽을만큼 아픈 날, 완전한 쓸모를 다해버린 날, 그 사람만큼은 서로의 옆을 지켜주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고, 가정을 꾸리며 살아가는 친구들이 당신을 보살펴 줄까. 가끔 평범한 어떤 날, 술 한잔에 서로의 상념을 터 놓을 수는 있겠다. 그런데 그의 자식과 당신이 물에 빠졌을 때, 누굴 먼저 구하겠냐는 상투적인 궁금증은 차치하더라도, 그는 당신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관심이 없다. 오로지 그의 자식들과 가족 생각 뿐인거다.


요몇일 끙끙 대며 앓아 누웠더니, 우리 엄마와 누나는 독거노총각인 내가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봐 종일 카톡을 보내며 전전긍긍 하고 있다. 친구들은 술한잔 먹으러 나오라는데, 내가 몸이 좀 안좋아서 못나간다고 하니 "여자 있었으면 나왔겠지! 미친놈!" 그러며 비아냥 거리곤 한다.


새벽에 피섞인 분비물들을 토해내고, 켜놓은 채 보지도 않는 TV와 조용한 휴대폰을 바라본다. 물을 마시다 컵을 든 채로 멍하니 선 채, 나는 뭐하는 사람인지 생각해 본다. 나는 오늘도 다시 잠을 들면, 영원히 깨지 않는게 소원이 되버린 삶을 살아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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