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팔이 선생의 밤

by 임기헌

작년에 아는 형님 딸아이 영어공부를 몇개월 봐준적이 있다. 그때가 고2였으니 지금은 고3이 됐을테고, 한창 수능 준비로 분주할 시기일 것 같다.


공부도 꽤나 잘한걸로 기억을 한다. 전교 10등 안에 꾸준히 드는 수재라고 들었다. 외모도 예쁘장하게 생겨서 형님이 얼마나 애지중지 하는지 한눈에 봐도 잘 느껴졌다.


그런 형님께서 몇일전 연락이 왔다. 딸아이 영어공부를 수능전까지만 좀 봐달라고. 영어학원을 다니긴 하는데, 영어성적이 계속 제자리라고 한다. 그리고 딸아이가 작년에 그 삼촌(=나)이 재미있는 표현도 많이 알려주고, 알기쉽게 알려줘서 요즘에도 한번씩 얘기를 넌지시 던진다며.


하하..^^ 웃음이 났다. 준비도 하나도 없이 학교 교과서만 보면서 가르쳤던 기억뿐이 없는데, 나 같은 '돌팔이' 선생을 기억해주다니.


그래서 오늘 가게를 조금 일찍 마치고 형님네 집으로 향했다. 한층 성숙해진 꼬마 아가씨가 문앞에서 반갑게 맞이해줬고, 곧장 방으로 가서 이야기를 나눴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할지, 수능이 얼마 안남았으니 내가 주도하는거보다 이 친구가 부족한 부분을 빠르게 채워나가는게 중요할 거 같아 모의고사에서 어렵게 느껴지는 부분들을 상세하게 들어보기도 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결론은, 우선 근 10년간 수능 영어 영역 시험지 전부를 가져와 시간을 재고 같이 풀어보기로 했다. 번역 스킬을 길러야 될테고, 속도는 곱절로 더 낼 수 있어야 될 거 같았다.


가령 이런거다. 몇년전 수능 지문에 배아줄기세포(embryonic stem cell) 관련된 내용의 문제가 등장했다. 그런데 보통 학생들은 이 생소한 단어 뜻을 알지못해 거기서부터 당황하기 시작한다. 그러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결국 시험을 망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번역 스킬은 여기서 나뉜다. 어떤 모르는 특정 단어를 붙잡고 늘어나면 안된다. 계속 들여다봤자 어차피 모른다. 그 단어 뜻이 무엇인지는 앞뒤 문맥과 전체 맥락을 보고 추측을 해야 된다. '아! 배아의 발생 과정에서 뭔가를 추출하는거니까 이건 줄기세포 같은 뜻이겠구나..' 하며 감각을 기르는 것이다.


학생 때 독서를 그토록 강요하는 이유도 여기에서 기인한다. 독서를 많이 한 학생은 아무리 긴 지문도 단번에 문맥 파악이 가능해진다. 수능때마다 만점 받은 학생 인터뷰를 뉴스에서 접해보면 하나같이 공통분모가 있다. 1년에 책을 300권 이상은 읽는다는 것.


이 친구는 대학교 목표가 1차는 이화여대, 그게 안되면 숙명여대나 동덕여대를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이화여대 가려면 너 지금 학교에서 계속 전교1등 해야 될텐데,," 했더니 발랄했던 애가 잠시 침묵한다. "뭐 정안되면 삼촌이 돈까스 튀기는 방법 알려줄게, 먹고사는 걱정은 하지마!^^"하며 안심을 시키고 첫날은 마무리를 지었다.


방에서 나오자 형수님께서 저녁상을 한아름 차려 놓으셨다. 밥 먹고 가라며. "아 괜찮은데,, 그럼 반주로다가 소주도 한잔 같이..?" 그렇게 옹기종기 모여앉아 웃고 떠들며 나는 또 고주망태가 되어갔다.


'저런 놈을 믿고 영어공부를 맡겨야 되나..' 하는 생각이 드실 때 즈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집을 나섰다. 수험생을 둔 부모님 마음과 수능을 앞둔 학생의 마음을 잘 챙겨 담아.


이제와 가당치도 않겠지만, 나도 살며 이런 가정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수능을 앞둔 딸아이와 보폭을 맞춰 함께 걸으며 지치지 않도록 응원을 하는거다. 그리고 수능이 끝난 뒤 고생 정말 많았다며 꼭 끌어안아 주는거다. 매밤마다는 딸에게 굿나잇 키스를 전하기도 하며.


달빛이 진다. 어둠은 짙어졌다. 꿈에서 깨어 나는 또 혼자 아무도 없는 집으로 터벅터벅 걸어간다. 산티아고 순례길과 아프리카 일주를 준비한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아버지 떠난 뒤, 그 후 1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