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나에게 말해주는 것들

by 임기헌

천금같은 책이 많다. 사람들로부터 입은 상처를 나는 언젠가부터 책으로 만회하며 살아간다. 누구나처럼 동성보단 이성들을 그렇게나 좋아하던 나는, 요즘의 이성들 앞에선 '독신주의자'라며 마음에도 없는 말을 떠들고 다니기도 한다.


근래 보기드문 장마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명을 달리했다. 이면에서는 폭우속에서도 명품으로 치장한 옷가지들을 화려하게 차려입고 골프선수가 된 마냥 툭하면 필드를 나가고, 고단한 하루를 살아내는 보통의 사람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멋진 레스토랑에서 육즙이 흥건한 스테이크와 고가의 와인을 먹었다며 여러 각도에서 사진을 찍어 과시하기도 한다.


'나만 아니면 돼!'라는 정신으로 중무장한 볼품없는 재야의 여인들은 오늘도 허벅지와 가슴골을 드러내며 어딘가에 있을 호기로운 남성들과 자본가들을 유혹한다. 벗은 듯 안벗은 듯 유혹의 방식도 제각각이다. 본인들이 벗어놓고, 쳐다보면 왜 쳐다보냐며 '시선강간'으로 고소를 하기도 한다.


그들의 자녀들은 어떻게 해서든 특출이나야 분이 풀리는지, 고차원은 커녕 일차방정식의 함의 조차 증명할 수 없어 보이는데 무언가의 자본을 투입해 엘리트층에 쉽사리 합류를 하는 경우도 종종 보게 된다. 그 친구들은 여차저차 해 결국 사회의 지도층을 이루기도 한다. 그 결과로 지금의 대통령 영부인(a.k.a 쥴리)과 같은 여성을 잉태하곤 한다. 여기까지다. 우리나라 시스템이 자본과 결합되는 과정이다. 천민자본주의의 발로이기도 하다.


도덕과 윤리는 중요하지 않다. 권력자에 기근하고 돈으로 지식과 학력 따위를 섭렵하면 된다. 왜 마흔이 훌쩍 넘어서야 나는 이런 순리를 알게 됐을까.


굳이 몰라도 될 부조리들과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를 알아가며, 나는 타협보단 어느덧 날선 비관론자가 되고 말았다. 달라지기는 커녕 깊은 수렁으로 빠지며 모순과 거짓이 사회를 지배해 나가기도 한다. 100개의 거짓이면 그 거짓은 진실이 되버리는데, 이에 진실과 거짓을 구별하기도 어려워졌다.


잘남을 곱절로 과시하고 겸손은 찾아볼 수 없는 시대다. 앞뒤 논리도 없이 본인들 주장은 모두 맞다고 우겨대니, 남의 말을 들을 필요도 없어졌다.


<호밀밭의 파수꾼>에 등장하는 주인공 홀든이 위선자들에게 환멸을 느껴 세상을 전전하는 것처럼, 공공의 선보다 갈등의 이데올로기가 지금의 사회를 장악해버린 것처럼 느껴질 때도 하루이틀이 아니다.


<맥베스>의 낭인들처럼 기분 내키는대로 살 법도 했는데, 그럼 더 윤택하게 살지 않았을까, 하는 철딱서니 없는 마음도 든다. 마약, 섹스, 자본, 거짓으로 얼룩진 우리나라의 위선자들처럼 범죄의 테두리를 교묘하게 벗어난 사각지대에서 나도 한번쯤은 그렇게 살아볼 껄, 하는 간헐스런 마음은 덤이다.


나쁜 사람들이 권력을 잡고 호화롭게 살아가는 이 세상이 비 오는 오늘 참 슬프게 느껴진다. 얼마전 작고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작가 밀란 쿤테라와 '좋은 놈들은 이미 다 죽었어'라며 한탄했던 <붉은 돼지>의 작가 미야자키 하야오가 살아있다면 우리에게 어떤 말을 건넸을까 싶다.


인생사에서 갈등을 풀어줄 열쇠는 항상 당신과 나 사이의 어디쯤에 있을거라 했는데, 그 어디쯤이 언제나 곡해되어 있는 것만 같은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별로 할 말이 없다. SNS의 글도, 책 원고도, 꽤 오래 쓸 일이 없겠다 이젠. 할 말을 잃게 만드는 세상에서 나는 오늘도 꾸역꾸역 겨우내의 하루들을 살아낸다.


오랜 안녕과 마음을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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