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워요, 순례씨!

나도 누군가에게 순례씨가 되고 싶다.

by 글방지기 감호

유은실 작가의 『순례주택』을 읽으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누군가에게 순례씨가 되고 싶다.”


순례주택 책을 3일 만에 후루룩 읽어버렸다.

너무 재미있어서 오늘은 절반 이상을 단숨에 읽었다.

특히 후반부는 얼마나 통쾌하던지,

카페에서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수림이의 모습에서 나를 보았다.

그에게 순례주택은 피난처이자,

탁월한 대안 공동체였다.


그렇다면 나에게 ‘순례씨’는 누구였을까.



나는 쌍문동에서 30여 년을 살았다.

빨간 벽돌의 다세대주택, 빌라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부모님은 개척교회 목회를 하셨고,

나는 자연스럽게 공동체적인 삶을 보며 자랐다.


김장철이 되면 빌라는 하나의 마을이 되었다.

엄마의 진두지휘 아래, 커다란 비닐과 들통이

빌라와 빌라 사이 공간에 펼쳐지고

300포기가 넘는 배추들이 차가운 지하수에 씻겨져 배추산성마냥 착착 쌓여갔다.

매서운 초겨울의 공기 속에서도

빌라의 모든 가족이 나와 신나게 함께 김장을 담갔다.


뜨거운 여름이면,

빌라 사이 공간에는 또 다른 비닐이 깔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신기하지만,

그곳은 우리의 수영장이 되었다.

아이들은 지하수를 받아 물장구를 치며 놀았고,

어른들은 수박을 잘라 평상 위에 앉아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시절 빌라는

아이들에게는 안전한 놀이터였고,

어른들에게는 서로를 품어주는 마을 공동체였다.


나는 결혼을 하고 세 아이를 낳은 후에도

그곳에서 계속 살아갔다.

남아 있는 이웃들과 인사를 나누고, 음식을 나누며

여전히 도란도란 연결되어 있었다.


지금은 바다가 있는 동네로 이사 왔지만,

아파트라는 구조 속에서는

그때의 풍경을 다시 만들기 어렵다는 것을 안다.


책을 읽으며 한참 생각해 보니

그 시절의 빌라 공동체는

나에게 하나의 ‘순례주택’이었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그런 공동체를 만들고

함께 살아가고 싶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변혁적인 신앙인의 삶을 배웠고,

복지 현장에서

그 신앙을 삶으로 실천하는 법을 배웠다.

어릴 적부터 쌓여온 시간과 공간들이

나에게는 아름다운 순례주택이었다.




그 안에서 만난 수많은 ‘순례씨’들이

나를 또 하나의 순례자로 만들어주었다.


폭풍우 같은 일상과

깨어진 세상 속에서도

당당히 순례자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함께해 준 이들에게 깊이 감사한다.


그리고 다짐해 본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

‘순례씨’가 되어주겠다고.

그런 순례주택 공동체로 이 순례의 길을,

함께 걷겠다고.


고마워요, 순례씨!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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