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 건너온 자
길 잃어본 자가 마침내 길 낸다
이명세 영화는 제목 빼고 음소거하고
딱 한 장면만 봐도 단박에 알아볼 수 있다.
이명세 스타일이 있다.
본 지 오래돼서 영화정보 가물가물한데
그래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장면 보아하니 이명세다.
그런 게 있다.
김기덕 영화도 마찬가지.
스치듯 봐도 딱 보인다.
그는 일관되게 상황을 극한으로 밀어붙인다.
깨달음 영화다.
레오스 까락스 <퐁네프의 연인들>처럼
극한 지점 통쾌하게 통과한다.
레오 까락스와 김기덕
공통적으로 탈출 혹은 구원에 관한 이미지다.
그런 감독 영화는 다 보지 않아도 된다.
하나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거의 보게 된다.
다른 영화에는 없는 짜릿한 쾌감 있다.
그 안에 달과 같은 미학 있다.
칼끝 같은 깨달음 있다.
차원 뛰어넘는 도약 있다.
관객으로서 비평가로서
그 보물 건져 올릴 수 있느냐의 문제다.
건져 올릴 수 있다면 상호작용 성공이다.
생이란 너의 호흡이 아니고
나의 혈액순환이 아니고
너와 나 사이의 상호작용이다.
그 '사이'가 바로 존재다.
'내'가 '너'의 이름 불러주기 전에 너는
네가 아니다.
아무도 너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너는 존재가 아니다.
상호작용하지 못하고 무인도에 고립되어 있다면
소통지능으로써
바깥뇌 즉 집단지성에 참여하지 못한다면
너는 살아 있어도 죽은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슈뢰딩거의 고양이.
너는 살아있기도 하고
죽어있기도 한 '중첩'상태다.
아니, 엄밀히 말해 중첩이 아니라
산 건지 죽은 건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뚜껑 열었을 때 결정된다.
이를 알면 두툼한 물리학책 읽지 않고도
양자역학 훤하게 꿰게 된다.
공부해서 아는 게 아니라
알고 나서 공부할 수 있다.
남의 가슴속에 떠 있는 달
내 안으로 길어낼 수 있다.
괜찮은 작가주의 영화는 거의 패턴이 있다.
창의는 자기 패턴의 반복이지
매번 세상에 없는 이야기 만들어 내는 게 아니다.
감독이든 작가든 모종의 패턴 발견한 이후
그를 변주하는 것이다.
이후 화수분처럼 끝없이 쏟아져 나온다.
죽을 때까지 창의 할 수 있다.
글도 마찬가지다.
그를 발견하지 못한 자들이나 펜 꺾는 것이다.
매일 쓰지 못하는 자는 일단 탈락
반복에도 차원이 있다.
제 얘기하는 형식으로도 시대와 만날 수 있고
인간을, 우주를 이야기할 수 있다.
반면 삶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제 바닥만 주야장천 드러내는 경우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