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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절대신비 Oct 03. 2024

중립은 없다

침묵과 현실도피는 있겠지만

 

깨달음*이란

스트레스 없는 상태가 아니라

스트레스 핸들링할 줄 아는 것이다.

 

오염되지 않는 게 아니라

진흙 속에서 한 송이 꽃 피워내는 것이다.

 

세상사에 흔들리지 않는 게 아니라

무게중심축 이동하여

삐걱삐걱 우당탕탕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절망하거나 도피하는 게 아니라

시대와 상호작용하며 엔트로피 증가하는 방향으로

묵묵히 전진하는 것이다.

 

전자는 온실 속 화초

후자는 삶의 전사

 

깨달음은 유유자적 세상과 거리 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과 함께 호흡하는 것이다.

 

미션을 받은 신의 사자 되어

어느 순간 신의 역할 하는 것이다.

스스로 주체 되는 것이다.

 

영역과 스트레스는 비례한다.

꽃길만 걸으면 바운더리 좁아진다.

흔들리지 않으려 용쓰다간

중립이니 극중이니 어중간한 데 서서

뻘쭘하게 된다.

 

과거 JTBC 뉴스룸 시청자로서

못내 아쉽고 미심쩍었던 것은

뉴스 자체보다 손석희 앵커의 기계적 중립 넘어선

그 특유 나라 없는 사람의 표정이었다.

 

그는 가끔 필요 이상으로

눈동자가 비어 있었다.

중도 혹은 중립이 아니라

아주 먼 나라에서 건너온 듯한 이방인의 기미

기계적 중립에 관한 진부한 농담 -이나 하는 앵커

 

진보라는 오른 다리가 앞으로 한 발짝 나아갈 때

보수라는 왼쪽 다리는

땅을 박차고 밀어내는 역할 한다.

 

언론인이건 누구건 굳이 보수와 진보

그 어느 진영에 속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영혼 없는 관전평, 규격화된 질문은

무언의 선언이 된다.

 

말하건대 중립은 없다.

부담 지지 않으려는 비겁함이 있을 뿐이다.

 

그 혹은 그가 속한 레거시 미디어가

최고의 언론이라는 전제라면

자기 목소리가 없다는 점에서도

인터뷰어 수준으로서도

우리에게 언론은 없다고 단언해도 무방하다.

 

골방 지식인의 냉소와 불평불만이

세상 바꿀 수 없는 이치와 같다.

 

기계적 중립은 요즘 유행하는 공정도 아닐뿐더러

언론으로서의 덕목도 아니다.

물론 한탄할 필요는 없다.


생은 역설

깨달음은 역설의 역설

 

언론이 변변찮으니 도리어 시민이 성숙한다.

민주주의는 단지 쪽수 대결에 불과하지만

오히려 낙차 키우는 미션에의 근거가 된다.

 

역설을 알면 생이 보인다.

긴 호흡으로 큰 걸음 걸으면

미지가 미리 당도하여 든든한 배경 되어 준다.


천년의 계획 세우면

아직 오지 않은 후대와

지금 이 자리에서 현재를 함께 호흡하게 된다.


외로움 타령은

지금 '나' 하나만을 붙들고

소라껍데기 안에 숨어 있다는 반증이다.

 





*깨달음 :  깨달음이란 백만 명이 등 떠밀더라도 화려해 보이는 왕좌 마다하고 의리 지키는 일. 그에 대한 후과 담담하게 수용하는 일이다. 진흙탕 길 감수하는 태도, 싫어하는 음식 탐식하는 아이러니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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