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에 ‘우주의 비밀 아는 자’란 기하학을 아는 자였다. 문명의 발상지 나일강이 범람하고 토지가 유실되었을 때 그 면적을 계산해야 했던 인류. 그렇게 베일에 싸인 우주를, 그 비밀을 한 꺼풀씩 벗겨내기 시작했던 것. 기하학은 인류에게 첫 번째 도구였다.
19세기말 그것은 물리학이었고 20세기 양자역학, 지금 21세기는 양자역학 포함한 -말하자면 -상호작용론*이다. 혹은 구조론. 물론 학자가 아닌 우리는 새로운 물리법칙 위해 밤새워 계산할 필요는 없다. 따로 아름다운 수식 발견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과학하는 자세 견지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철학하는 태도, 인문학이다. 인간이냐 짐승이냐, 그 갈림길에서 질문에 답하는 것. 즉 내세, 천국, 귀신, 무속, 미신, 결정론 등등 괴력난신 타파하는 것. 신이든 이데아든 우상 쳐부수는 것.
늙은 수컷 침팬지*나 저 숱한 트럼프들은 시대를 거슬러 퇴행해도 우리가 탄 엔트로피 열차는 언제라도 전진하기 때문이다.
숫자 0에 대한 사유만으로도 우주의 비밀에 접근한 것 같아 -죽어도 여한 없을 만큼 -온 생 소름 돋는다는 수학도를 본 적 있다. 무럭무럭 자라 장차 선비가 되겠다던 물리학도 만난 적도 있다. 당연하다. 그들은 우주의 속살 조금쯤 훔쳐본 것이다.
말할 수 있다. 우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머릿속에 그림 띄울 수 있다면 어느덧 하루가, 일생이 한 손에 잡힌다. 순간이 그득하여 뿌듯해진다. 추호의 의심할 수 없는 명백한 우주 법칙. 바로 그 법칙과 일치하는 나만의 룰 가질 때, 우리 사회에 모종의 시스템 빅뱅처럼 구축될 때, 우주의 비밀이 순간순간 내 안에서 재현될 때 삶은 황홀하다.
“우리 이렇게 살아있지 않은가? 이전에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우리가 지금 이렇게 살아 우주를 사유하고 있지 않은가. 시대를 끌어당기고 마중하고 있지 않은가!.”
혹자*는 삶이 의미 없다는 전제로 말들하곤 하지만 생이라는 긴 여정의 끝에서 우주 한 바퀴 둘러본 뒤 마침내 이런 말 하고 있는 자신을 본다면 온몸 전율에 휩싸여야 마땅하다. 그 순간 ‘나’를 둘러싼 것이 바로 의미다.
삶의 의미와 삶 그 자체의 환희는 둘이 아니다. 의미 깨달으면 삶이 그 자체로 환희롭다. 그것이 의미의 의미다. 의미 찾아 그대 여기까지 올 충분한 당위가 있었다. 물론 태어났으니 한 번 살아보는 것뿐이지만, 단 한순간만이라도 존재다운 존재로 우뚝 서 보는 체험은 ‘시작부터 끝까지’ 우주의 일생이라도 산 듯 벅찬 쾌감에 빠져들게 한다. 그것이 생 그 자체에의 황홀. 바로 깨달음이다. 열반이라 해도 좋다.
양자역학을 꿰도 우주의 비밀 -즉 깨달음 -에 대해 어리둥절할 수 있지만, 시대의 첨단을 걷는 것은 인간 존재에게 미션에 다름 아니다. ‘존재의 근원’은 인간을 삶 그 자체의 환희 한가운데 서 있게 하므로.
단지 의미가 아니라 의미의 의미 낚아채기를. 철학을 철학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을 기억하기를.
이번(2022년) 노벨 물리학상은 양자얽힘을 연구하는 이들에게 돌아갔다. 양자얽힘은 -인문학적으로 말하면 -한마디로 이 우주에 ‘거리’란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크기’도 없다는 뜻. 이런 것들은 상대적으로만 존재(?)한다. 즉, 우리 사이 거리도 0. 너는 나고 나는 너. 당연하지 않은가? 우주 시작 이전 특이점 때를 생각해 보라. 사실 그때와 지금은 달라진 게 없다.
*상호작용론 : 문맥상 어느 정도 가상으로 명명한 것. 양자역학이 더욱 발전하면 필시 상호작용론이 된다. 존재는 ‘너’와 ‘나’가 아니고 너와 나 사이의 상호작용이며 관계 그 자체이므로.
*늙은 수컷 침팬지 : 젊은 수컷 침팬지의 키워드가 혈기왕성, 용맹이라고 치면 늙은 수컷 침팬지의 그것은 어리광, 진상 정도가 되겠다. 퇴행하는 행태의 대표적 은유로 쓰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