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는 무한하게 퍼져 있고 태양은 그중 하나의 항성에 불과하며 저 별들도 모두 태양과 같은 종류의 항성이다.”
이 말을 한 사람은 결국 이단의 혐의로 공개적으로 화형에 처해진다. 17세기가 막 시작될 무렵이었다.
그는 바로 -지동설과는 조금 다르지만 -최초의 자전설을 주장하고 다양한 학문을 가르쳤으며 당시 로마 가톨릭 교리와 다른 자신만의 과학적 견해를 주장한 수사이자 철학자 조르다노 브루노*. 작금의 신과 인간들은 그때보다 조금 더 진화했을까? 글쎄.
예술이 더 이상 왕이나 귀족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 아니듯 철학 역시 목에 칼이 들어와도 진실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학문에의 태도. 우리는 우주의 비밀을 더 이상 베일에 가려두어서는 안 된다. 비로소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누구도 말하지 않는 진실 말하는 것. 그것이 철학하는 삶이다.
이제는 진실을 말한다는 이유로 화형 당하는 일은 없겠지만 죽음의 강에 한 발 딛고 서 있어야 하는 것은 같다. 제 목숨 공중에 매달아 놔야 하는 것은 같다. 저잣거리에서도 아주 잘 보이도록. 지나가는 무뢰한이 장난 삼아 돌이라도 던질 수 있도록. 그 첨예하며 아슬아슬한 철학적 문제의식이 독재자와 악의 무리 정확히 조준할 수 있도록. 누구나 제 안에 괴물이 산다는 것 깨달을 수 있도록.
우주의 뉴런으로서 그렇게 오늘의 할 일 하는 것. 철학은 인간을 날마다 칼끝 같은 벼랑에 서게 한다. 천둥 같은 진실 대면하게 한다. 벼락같은 순간 달리게 한다. 바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문제다.
철학은 어제를 살해하고 오늘을 통과하여 내일을 쏘아 올리는 것. 나를 죽이고* 관계 살리는 것. 일개 인간인 나의 입장이 아니라 누구도 소외되지 않을 신의 입장에 서는 것. 시냅스와 시냅스 간 번쩍이는 만남 주선하는 것이다. 철학하라. 그것은 역설적으로 순간을 찬란하게 한다. 생이 지금 이 순간에 다 농축되므로 그대의 ‘순간’은 더욱 깊고 진한 맛을 낼 것이다.
너무 멀리 있어 서로 만날 수 없고 닿을 수 없다면, 그 존재의 유무조차 모른다면 우리는 서로에게 존재하지 않는 것. 그런 의미에서 인류는 우주의 뇌, 우주의 뉴런. 다른 종족은 아직 발견하지 못했으니 우주의 뉴런은 인류만의 몫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즉 저기 달이 있어도 우리가 보지 않으면 달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이는 양자역학의 세계관.
이에 아인슈타인은 반박한다. “우리가 달을 쳐다보지 않는다고 해서 저기 달이 없는 것이냐?” 지금 인류는 말한다. “응! 없는 거야.”
사실 지금쯤은 아인슈타인도 양자역학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여담이지만 지금 내 책상 위 조그만 아인슈타인 피규어가 나를 보고 있다. 그렇다. 지금의 아인슈타인 -피규어 -에게 나는 존재한다.
*조르다노 부르노 : (1548~1600)
*나를 죽이고 : 나를 죽인다는 것은 나를 내세우지 않는다는 것. 물론 ‘나를 내세우지 않는다는 것’이 무조건 착하게 양보한다는 뜻은 아니다. 각자 자신의 입장에만 선다면 너와 나 사이의 진실은 영영 포착할 수 없다. 이에 그 누구도 소외되지 않을, 사각지대 없는, 전모를 보기에 가장 좋은 포지션을 소개하기로 한다. 이른바 신의 포지션, 신의 관점. 앞으로 내내 다루게 될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