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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설렘병법

벽 부수고 매트릭스 탈출

문은 따로 있질 않고 벽은 원래 없었던 것

by 절대신비


주역이 가치 있다면

점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천지 만물 우주 운행 담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삶의 태도가 바로 진리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팔괘가 중요한 게 아니다.

내러티브가 중요한 게 아니다.

메시지 주려고 애쓰고 있는가?


서스펜스 끝나면

영화는 막 내리고 관객은 자리 떠난다.


우리 생도 그렇다.

끊임없이 다시 서야 할 이유

생이라는 소름 끼치는 서스펜스와

그 길에서 뜨겁게 분출되는 스릴에

지지 말아야 할 이유


있지도 않은 운명 따위에

휘둘리지 말아야 할 이유다.


점치는 것보다 자존감 높이는 게 낫다.

운명 믿기보다 꿈 가지는 게 낫다.

사주팔자 따위에 휘둘리기보다

오늘이라는 전장에서 깃발 휘날리며

승리 적립하는 게 멋지다.


삶이란 무수한 전쟁의 기록

너와 나는 삶의 전사

그 무엇이 되겠다는 목표보다

세상에 나서 이 정도는 해 주마, 하는


소실점 발견하는 게 좋다

미션 하나 품는 게 좋다.

그것은 저 너머 극지에 있다.


내 진로나 장래 희망 같은 것만 생각하다 보면

내가 할 수 있는 일 바운더리 좁히다 보면

제 역량과 한계에 갇히다 보면


잘 될 때는 잘 된다는 이유로

안 될 때는 안 된다는 이유로


불안초조해질 수밖에 없다.

우울해질 수밖에 없다.

부정 통과한 긍정이 아니라

그리하여 진정한 긍정이 된 절대긍정이 아니라

부정을 위한 부정에 매몰될 수밖에 없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물에 물 탄 맹물긍정 될 수밖에 없다.


삶 그 자체의 환희에 눈 뜨지 못하고

따로 중뿔난 의미 찾아 헤맬 수밖에 없다.


마침내 아침에 눈 뜨는 일이

권태로울 수밖에 없다.


삶은 곧 예술


꼭 예술가가 아니더라도

인류에 영감 줄 수 있다.

이 어지러운 세상에 화두 하나 던질 수 있다.

방황하는 인류에 방향 제시할 수 있다.

지금보다 나은 세상 만드는 데에

벽돌 한 장 쌓을 수 있다.


웅지 품은 장대한 인간 하나

제 안에서 발견하는 게


이 정상에서 저 정상 바라보는

장엄한 순간 포착하는 게

저 너머*를 지금 여기에서 실현하는 게


매트릭스 속 NPC에서 탈출하는

유일한 해방구


게임 속 시뮬레이션에 갇힌 한

답은 없다.


인생에 정답이 없는 게 아니라

생을 대하는 NPC* 태도에 답 없는 것

인생은 계획대로 되는 것이 아니지만


저 하나에 갇힌

그리하여 계획 없는 인간과는 도무지

미지 도모할 수 없는 것


운명이 우리를 옥죄고 있는 게 아니라

매트릭스에 갇힌 자아가

제 안 맴돌고 있는 것이다.

그 주인 옴짝달싹 못하게

가두고 있는 것이다.

판도라 상자는 어차피 열려야 했다.

독이 든 상자 속 고양이*는

진작에 상자 부수고 나왔어야 했다.


실험실 밖으로 탈출,

저를 가둔 또 다른 NPC들에게

뻐큐 날렸어야 했다.


인간이라는 이름은

희망 기다리는 일개 캐릭터가 아니라

마침내 신화 창조하는 예술가다.

신이다.

신이 ‘나’에게로 와 내가 되는 순간이
눈앞 확연하게 선명해지는 순간이
나를 둘러싼 견고했던 벽,
균열 생기며 일시에 부서지는 순간이

분명 있다.


그대!

지금도 늦지 않았다

생은 언제나 지금 이 순간부터!


*저 너머: 피안 혹은 깨달음 세계. 이승의 번뇌를 해탈하여 열반에 도달한 경지를 말한다.

*NPC: Non-Player Character의 줄임말로 비디오 게임 내에서 플레이어가 직접 조작할 수 없는 캐릭터를 말한다. 플레이어에게 정보를 주거나 안내하거나 공격하며 상호작용한다. 게임 세계관을 풍성하게 하며 게임 몰입도와 재미를 높여준다. 역할은 있되 자유의지는 없다. 그를 과연 '존재'라고 할 수 있을까?

*고양이: 독이 든 상자 속 고양이는 앞서 밝혔듯 양자역학 사고실험 속 고양이,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뜻한다. 그 고양이에게도 따로 이름이 있을 것이다. 상자 속에 갇힌 고양이는 부디 탈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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