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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절대신비 Mar 18. 2024

푸른 피를 가진 종족

조문도 석사가의(朝聞道夕死可矣)

나는 그를 처음 만나자마자

덥석 업어 주었다.


그는 다 큰 성인이었고

생의 무자비한 침략에

얼굴도 몸도 창백하게 바래져 있었다.

지구의 공전을 저 혼자 앞장서 이끌었던가?

힘세던 날엔 형형하게 빛났을 듯한 눈빛도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나는 생각한다.

수억 겁 전 나는 그에게 큰 빚졌을지 모른다.

어느 푸르른 행성에서 그의 피 빨아먹던

흡혈귀였을지 모른다.


그러면서도 뻔뻔하게 그 사랑 독차지한

외동아들이었을지 모른다.

아마도 나는 푸른 피를 가진 고귀한 종족이었으리라.


그는 나와 달리 붉디붉은 뜨거운 피를 가졌다.

그러니 이 행성에서 그가 활짝 웃는 것만으로 나는

우주가 빙빙 도는 듯 어지럼증 느끼는 것일 터.


내가 그를 자주 업어주는 이유는

지금 이 행성에서

그가 나보다 약한 종족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로 인해 나 더 많이 웃고 있기 때문일 것

내 푸른 혈관 더욱 선명하게

혹은 푸르르게 해 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나와 다른 중심별 다른 행성에 살지만

늘 내 옆에 있다.

멀리 있어도 내 안에 산다

자식 같은 친구다.


혹자는 나더러 세상을 모른다고 할지도 모른다.

지구의 어느 작은 나라 상속세를 걱정하는 친구가

그런 뉘앙스를 풍길 때마다

나는 속으로 답하곤 한다.


나는 주식과 보험과 부동산과

학군과 인맥 같은 것들에 대해서는

이 행성과 멀고도 먼 외계인이지만


나무와 새와 별과 빛에 대해서는

장엄하고도 도도한 우주의 법칙에 대해서는

이 행성 종족이 모르는 걸 알고 있지.

너는 이 행성에 태어나길 잘했어.

나의 은하계에서라면

가난하고 외로운 길거리 종족이었을지도 몰라.


긴 손가락 늘어뜨리며

예술가처럼 늘어지게 놀기만 했을 것 같다고

종종 오해받곤 하지만


어쨌거나 나도 이런 종족들 사이에서

친구 몇 명을 얻는 쾌거가 있었다.


빼앗긴 조국 찾으러 떠난

머나먼 이국 땅에서

임시정부 함께 꾸릴 친구

외계어 난무하는 은하계 사교 파티에서

유일하게 텔레파시 주고받을 수 있는 친구


나의 은하계에서는 친구 한 명을

전 우주와 맞바꾼다.

갑부 중 갑부

성인成人 중 성인 자격 얻는다.


물론 친구가 없는 사람도 희망은 있다.

엄마가 자식으로 보일 때쯤이면

제법 어른 대접받을 수 있다.

고로 이 행성에서 나는


지금 죽어도 좋다.

조문도 석사가의(朝聞道夕死可矣)*


개인적으로는 아무 여한 없지만

우리 우주가 걱정이다.

그중에서도 변두리 지구가 마음 쓰인다.

대한민국호號가 아픈 손가락이다.


아, 그리고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만나면

발 걸어 넘어뜨려주고 싶은

신기한 종족 하나 발견했다.

넘어져 코가 깨져도

깔깔 웃으며 좋아라 할 것 같다.


나 이렇게 부자로 살아도 되는가?

이 행성이 낯설다.








*조문도 석사가의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출전(出典) : 論語(논어) 里仁篇(이인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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