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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경철 Jun 23. 2022

깊은 심심함

한병철의 ‘피로사회’ 중에서

유치원에서 공지가 왔다. 내일은 파티가 있는 날이고 좋아하는 장난감을 가지고 와도 좋다는 것이 요지였다. 나는 저녁에 아이에게 좋아하는 장난감을 챙겨 놓으라고 말했다. 다음날 어떤 장난감을 가지고 가는지 궁금해서 가방을 열어보았다. 과일이 들어있던 사각 플라스틱 통에 종이 쪼가리와 막대기가 들어 있었다. “엥? 이거 뭐지?” 통을 열어 살펴보니 종이 쪼가리는 물고기고 막대기는 낚싯대인 것 같았다. 플라스틱 통 바닥은 파란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그날 유치원 가는 길에 아이에게 물어보았다. 오늘 가장 좋아하는 장난감을 넣었냐고. 아이는 자신 있게 ‘네’라고 말했다. 그리고 언니와 같이 만든 것인데 자기가 아주 좋아하는 장난감이라고 말했다.     


나는 아이에게 장난감을 사준 적이 언제였는지 생각해 보았다.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아이가 나에게 장난감을 사달라고 말했던 적이 언제였는지 생각해 보았다. 그것 역시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사실 나는 아이들 장난감 사주는 것에 인색한 엄마이다. 대부분의 장난감은 일주일 정도 후면 한쪽으로 밀려나 처박혀 있기 일쑤기 때문이다. 대신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아이들을 위해 A4용지는 늘 후하게 제공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 방이며 집안 구석구석 종이 쪼가리들이 늘 널려있고 놀이에 필요한 것들을 아이들 스스로 종이로 만들던지 재활용 박스를 뒤져 필요한 것들을 자급하고 있었던 것이다. 요술 봉, 팔찌, 가방 등등….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종이로 만들어 놓았다.     


한병철의 ‘피로사회’에 ‘깊은 심심함’에 대한 내용이 있다. 심심한 것에 참을성이 없는 현대인들은 창조적 과정에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깊은 심심함을 허용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아이들은 항상 넉넉하게 있는 종이를 보며 그림을 그리다가 그것도 심심해서 종이접기를 하다가 이제는 종이로 자신들이 필요한 것들을 만들어내게 되었다. 종이만 있는 것에 대한 ‘심심함’이 만들기라는 ‘창조적 과정’을 낳은 것일까?

화장실 갈 때까지도 들고 가는 핸드폰을 나도 이제 좀  손에서 놓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심심함을 좀 견뎌보아야 할 것 같다.  

  


한병철의 ‘피로사회’ 중에서     


철학을 포함한 인류의 문화적 업적은 깊은 사색적 주의에 힘입은 것이다. 문화는 깊이 주의할 수 있는 환경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러한 깊은 주의는 과잉 주의에 자리를 내주며 사라져 가고 있다. 다양한 과업, 정보 원천과 처리 과정 사이에서 빠르게 초점을 이동하는 것이 이러한 산만한 주의의 특징이다. 그것은 심심한 것에 대해 거의 참을성이 없는 까닭에 창조적 과정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는 저 깊은 심심함도 허용하지 못한다. 발터 벤야민은 깊은 심심함을 “경험이 알을 품고 있는 꿈의 새”라고 부른 바 있다. 잠이 육체적 이완의 정점이라면 깊은 심심함은 정신적 이완의 정점이다. 단순한 분주함은 어떤 새로운 것도 낳지 못한다.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을 재생하고 가속화할 따름이다. (중략) 걸으면서 심심해하고 그런 심심함을 참지 못하는 사람은 마음의 평정을 잃고 안절부절못하며 돌아다니거나 이런저런 다른 활동을 해볼 것이다. 하지만 심심한 것을 좀 더 잘 받아들이는 사람은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 어쩌면 걷는 것 자체가 심심함의 원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인식은 그로 하여금 완전히 새로운 움직임을 고안하도록 몰아갈 것이다. 달리기, 또는 뜀박질은 새로운 움직임의 방식이라기보다 그저 걷기의 속도를 높인 것일 뿐이다. 이를테면 춤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움직임이다. 오직 인간만이 춤을 출 수 있다. 어쩌면 인간은 걷다가 깊은 심심함에 사로잡혔고 그래서 이런 심심함의 발작 때문에 걷기에서 춤추기로 넘어가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걷기가 그저 하나의 선을 따라가는 직선적 운동이라면 장식적 동작들로 이루어진 춤은 성과의 원리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 사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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