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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경철 Aug 25. 2022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수전 손택(Susan Sontag)의 ‘타인의 고통’ 중에서

저녁밥을 차려주고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둘째 아이의 자리 밑에 밥 한 덩이가 떨어진 게 보였다. 나는 밥을 주으면서 말했다.

“이 아까운 밥을 이렇게 흘리면 어떻게!”

마주 보고 앉아 있던 첫째가 거든다.

“그래. 아프리카에는 굶는 아이도 있어.”라고.     


내가 어릴 때는 “농부가 쌀밥 한 그릇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 줄 아니!”라는 말을 곧잘 들었던 것 같은데, 요즘은 아프리카에 굶는 아이가  언급된다. 먹지 못해 팔다리가 기형적으로 가늘고 배만 볼록한 모습이라던가, 파리를 쫓을 힘도 없이 누워있는 아이의 모습은 이제는 ‘기아’의 상징이 된 듯하다.      


그렇다면 만약 아이들이 “아프리카에 굶는 아이들이 있는 것과 우리가 지금 밥을 아껴먹어야 하는 것은 무슨 관계가 있는 거죠?‘라고 묻는 다면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타인의 고통에서 수전 손택은 ‘당면의 문제가 타인의 고통에 눈을 돌리는 것이라면, 더 이상 ‘우리’라는 말을 당연시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한다. 아이의 질문 속의 ‘우리’는 아프리카에 가 본 적도 없고 돈이 없어 밥을 먹지 못하는 것을 상상만 하는 ‘타인’이다. 그렇다면 굶는 고통을 알지도 못하는 ‘우리’는(편안한 집에 앉아 매체를 통해 굶는 아이들의 사진을 보는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이라는 책을 읽고 내 나름대로 아이의 질문에 답안지를 작성해 보았다.     

‘세상에는 이해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기도 해.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도 하지. 누구도 그 상황에 있기를 선택한 사람은 없어. 그러니 지금 우리가 누리는 것들도 당연한 것이 아니니까 감사해야겠지. 그리고 이런 일들이 왜 일어나게 되었는지 조금 더 공부를 해 보고 관심을 가지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보자.’     


답안지가 영 신통치 않다. 하지만 나 역시도 지금은 아이에게 이 정도의 말 밖에 해 줄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타인’이지 않은가…. 어렵다.     


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 중에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 주는 셈이다. 따라서(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 (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 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휘저어 놓는 고통스러운 이미지들은 최초의 자극만을 제공할 뿐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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