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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경철 Jan 12. 2023

펠트 장화에 꽂혀 있던 숟가락을 뽑아 든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중에서

'새해 계획을 세우지 않아도 되려나….’ 해가 바뀐 지 일주일이 훌쩍 넘은 지금에서야 새해 계획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어릴 때는 새해 첫날 뜨는 해를 본다고 밤을 세기도 하고, 새로 산 수첩의 첫 장에 조심스럽게 새해 계획을 적기도 했었는데 올해의 첫날은 다른 때보다 더 아무 감흥 없이 지나간 것 같다. 다른 날과 조금 다른 게 있었다면 새해라서 떡국을 먹은 정도이다. 새해를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맞이하는 내가 뭔가 잘못된 걸까. 잘못되었다면 무엇이 어떻게 잘못된 것일까. 미래에 대한 기대감이 없어진 건가. 아니면 아무 생각 없이 하루를 살고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하는 중에 한 남자의 하루를 쓴 소설을 읽었다.  

    

그렇다고 그의 일상이 나와 비슷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는 영하 30도의 추운 날씨에 간첩으로 오해받아 8년째 수용소에서 생활하고 있다.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8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으니 수용소 생활의 ‘달인’이 되어 있는 그의 시선과 생각과 움직임을 따라 강제수용소의 하루를 경험했다. 


힘에 겨운 노동, 극심한 추위와 배고픔은 견디는 것이지 익숙해질 수는 없고, 인간취급을 받지 못하는 삶에서 오는 부당함과 억울함은 상처가 되어 아물지만 몸에 새겨져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주인공은 그저 하루를 살기 위해 먹는 것, 추위를 피하는 것, 요령 있게 일하는 것에 몰두한다.

어쩌다 얻은 빵을 뺏기지 않기 위해 궁리하고, 담배 한 모금을 구걸하며 숟가락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그는 그저 자신의 삶에 충실한 한 사람일 뿐이다. 그러나 그는 욕심내어 남의 것을 넘보지 않고, 위기의 순간에는 하나님을 찾기도 하고, 건더기도 없는 야채죽을 음미하며 먹는 선량하고 성실한 사람이다.     


힘든 하루를 보내고 온기도 매트도 없는 침대에 온몸을 꽁꽁 싸매고 잠을 청하는 그는 상황이 어쨌든 그 내용이 무엇이든 온전한 하루를 보냈다고 생각한다. 인생에는 어쩌면 원대한 꿈이나 계획은 액세서리 같은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있으면 돋보이고 품격을 줄 수는 있겠지만 없다고 해서 크게 문제 될 것은 없는 것. 주어진 하루를 성실히 살아내는 소설 주인공인 슈호프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더불어 글이 발표된 지 60여 년이 지나 국적도 성별도 살아온 배경도 환경도 어느 것 하나 접점이 없는 어느 한국의 아줌마에게도 진한 여운과 감동을 주는 작가의 ‘위대함’과 글의 ‘영향력’에 대해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중에서     


슈호프는 펠트 장화에 꽂혀 있던 숟가락을 뽑아 든다. 이 숟가락이야말로 그에게는 아주 소중한 물건이다. 북부 수용소를 전전하는 동안 한 번도 떨어져 본 적이 없던 그런 소중한 물건이다. 슈호프는 자신이 직접 알루미늄 전선을 녹여 모래에 부어 만든 숟가락으로 손잡이에는 <우스치-이지마, 1944>이라는 글까지 새겨져 있다. 

 그러고 나서 모자를 벗는다. 그러자 박박 깎은 머리통이 드러난다. 날씨가 춥다고는 하지만 남들처럼 모자를 쓰고 식사를 할 수는 없다. 그는 야채수프 그릇에 재빨리 숟가락을 넣고 휘저어 야채수프 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것이 뭔가 하고 살펴본다. 보통 수준 정도는 된다. 물론 처음 수프를 퍼주었을 때보다야 못하겠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심한 정도는 아니었다. 페추코프가 국그릇을 지키면서 감자 한 덩어리 정도 낚시를 했으리라는 것은 짐작 가는 일이다. 

 야채수프는 따뜻하다는 것이 유일한 장점인데, 다 식어버렸으니, 오늘은 그나마도 운이 없는 날이다. 그러나 슈호프는 맛을 음미하며, 천천히 먹기 시작한다. 설사, 지붕이 불탄다고 해도, 서두를 생각이 전혀 없는 것이다. 수용소 생활에서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아침 식사 시간 십 분, 점심과 저녁 시간 오 분이 유일한 삶의 목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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