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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경철 Feb 09. 2023

글자나 낱말들을 가지고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어.

헤르만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중에서

 헤르만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라는 책을 읽었다. 청소년시절 수도원에서 만난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친구사이가 되었지만 서로 다른 인생을 살아간다. 나르치스는 일생 수도원에 살면서 수도원 원장이 되고 학자의 삶을 살아간다. 골드문트는 수도원을 떠나 떠돌이가 되어 방탕하고 부도덕하며 자유분방한 삶을 살며 예술가가 된다. 절제와 방탕, 인내와 무절제, 구속과 자유, 이성과 감정.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의 삶을 단어로 나열하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책의 대부분은 떠돌이가 된 골드문트의 삶에 할애를 한다. 책의 처음과 마지막 부분에 그것도 나르치스와 골드문트가 함께 있을 때에만 나르치스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이 정도 되면 책 제목이 ‘골드문트’여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하긴 수도원에서 매일 규칙적이고 금욕적인 삶을 사는 나르치스에 대해서는 이야깃거리가 빈약하긴 할 것이다.     

 

나는 골드문트의 풍부한 감정, 때로는 폭주해서 주체할 수 없는 에너지와 집중력이 위태로워 보였지만 찬란해서 눈이 부셨다. 나는 굳이 따지자면 나르치스에 더 가깝다. 그래서 나르치스가 그런 것처럼 나 또한 골드문트를 빛나지만 만질 수 없는 그 무엇으로 바라본다. 나르치스처럼 나도 골드문트처럼 살 수도 없고 그렇게 살고 싶은 마음도 없다.(책에서 그는 살인을 두 번이나 저지른다!) 하지만 무엇인가에 자신을 태워버릴 것처럼 몰두하고 내던지는 삶,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은 그 자체로 위대하기에 경건하고 존경받는 수도원장 나르치스가 마지막까지 방탕아 골드문트를 소중한 친구로 대하며 부러움의 시선을 던질수 밖에 없었나 보다.     




헤르만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중에서     


언젠가 골드문트가 말했다. ‘내 생각에는 길가에 피어있는 꽃 한 송이나 기어 다니는 작은 벌레 한 마리가 도서관을 가득 채운 모든 책들보다도 더 많은 것을 말하고 더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지 않을까 싶어. 글자나 낱말들을 가지고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어. 간혹 어떤 희랍어 글자, 가령 세타(θ)나 오메가(Ω) 같은 글자를 쓰면서 펜을 약간 돌려서 써보면 글자가 꼬리를 치면서 물고기가 될 때가 있어. 그러면 순식간에 이 세상의 모든 개천과 강물이 마음속에 떠올라. 뿐만 아니라 시원하고 물기가 있는 모든 것이 떠오르기도 하지. 호머가 항해하던 큰 바다라든가, 고기잡이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로 거듭나던 그 물가도 생각나지. 그런가 하면 글자가 새로 둔갑하여 꼬리를 치켜세우고, 깃털을 부비고, 몸통을 부풀리고, 지저귀고, 날아가고 하기도 해. 그런데 나르치스 너는 아마도 그런 글자들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겠지? 그렇지만 바로 그런 글자들을 가지고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말을 너한테 해주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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