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리프와의 전쟁
우리가 일상에서 당연하게 여기는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쓰임새에 맞게 디자인이 적용됐을 때 의도적으로 설계된 것임을 잘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1961년, 타이포그래퍼 허버트 스펜서 Herbert Spencer는 이 문제를 직접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타이포그래피카 Typographica 매거진에서 런던 중심부에서 히드로 공항까지 이동하는 짧은 여정을 사진 에세이로 기록했습니다. 비록 단순히 A3 도로를 따라가는 여정이었지만, 이 과정에서 표지판의 심각한 일관성 부족이 드러났습니다.
1. 색상, 기호, 서체가 지역마다 다름
2. 서로 다른 기관이 제작한 다양한 표지판이 공존
3. 운전자가 길을 찾기 어렵도록 만드는 비효율적인 체계
특히, 영국 최초의 고속도로 개통으로 인해 운전자들이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속도로 표지판을 지나쳐야 했기 때문에, 빠르고 명확하게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일관된 타이포그래피가 필요했습니다. 당시 영국 정부는 기존 도로 표지판으로는 새로운 고속도로의 속도와 기능을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이에 따라, 1957년 콜린 앤더슨 경 Sir Colin Anderson이 이끄는 자문위원회 Advisory Committee를 구성하고, 미국과 유럽의 고속도로 표지판을 참고하며 새로운 시스템을 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영국 슬라우 Slough에 위치한 도로연구소 Road Research Laboratory에서 실험이 진행되었고, 디자이너 족 키니어 Jock Kinneir가 위원회의 핵심 권고 사항을 구체화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방문 강사로 활동하던 첼시 예술대학교 Chelsea School of Art에서 재능 있는 학생 한 명을 동료로 영입하였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마거릿 칼버트 Margaret Calvert였습니다. 당시 정부는 키니어와 칼버트에게 독일의 도로 교통 시스템 서체인 FF DIN과 유사한 서체를 제작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유능한 디자이너답게 단순한 모방이 아닌, 정보 전달이 빠르고 혼동의 여지가 적은 서체를 직접 디자인하는 데 집중하였습니다. 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가독성이었습니다. 운전자가 빠른 속도로 이동하면서도 먼 거리에서 신속하고 정확하게 정보를 인식할 수 있는 서체를 만드는 것이 핵심 목표였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명확한 서체를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아름다움과 감성도 함께 고려하였습니다. 그 결과, 당시 유행하던 차갑고 기하학적인 산세리프 서체 대신, 영국의 시골 풍경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부드럽고 따뜻한 인상의 서체를 지향하였습니다. 또한, 런던 지하철 London Underground의 전용 서체를 디자인한 에드워드 존스턴 Edward Johnston의 '런던 트랜스포트 London Transport' 서체에서 영감을 받아, 소문자 'l'는 하단이 살짝 구부러진 형태로 디자인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대문자 'I'이나 숫자 '1'과의 혼동을 방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영국 운전자에게 최적의 가독성을 제공하는 도로 표지판을 만들겠다는 목표 아래, 그들은 결국 ‘트랜스포트 Transport’라는 서체를 완성하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처음에는 모터웨이 Motorway라는 서체가 먼저 만들어졌습니다. 이 서체는 현재도 고속도로 표지판의 숫자, 나침반 방위 그리고 일부 대문자 이니셜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서체는 알파벳 전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일반적인 글꼴로는 쓸 수 없습니다. 반면, 트랜스포트 서체는 처음부터 고속도로 표지판의 거리 정보나 목적지 이름 등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표지판들은 당시까지 영국에서 볼 수 없었던 가장 혁신적인 기능적 디자인이었으며, 이로 인해 강한 찬반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트랜스포트 서체의 대소문자 혼용과 산세리프 서체에 대한 주된 논란에 대한 발단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기존에는 모든 글자가 대문자로 표기
2. 그러나 키니어와 칼버트는 대소문자를 혼용하여 가독성을 높이고자 함
3. 산세리프 서체 사용이 당시 일부 사람들에게 강한 거부감을 일으킴
당시 더타임스 The Times 신문에는 표지판 서체를 비판하는 독자 편지가 빗발쳤으며, 디자인 잡지에서 열린 토론회에서도 이 문제를 깊이 다루었습니다. 캘리그래퍼이자 석공인 데이비드 킨더슬리 David Kindersley는 전통주의자를 대표하여 자신의 대문자 전용 알파벳을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후에 그의 서체와 트랜스포트 서체를 비교 테스트해 본 결과, 그가 주장한 것만큼 개선 효과가 크지 않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족 키니어와 마거릿 칼버트가 깨달은 가장 중요한 사실은, 운전자는 사실 표지판의 글자를 하나하나 읽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운전자는 자신이 원하는 목적지를 찾을 때 단어의 모양을 즉각적으로 인식할 수 있습니다. 즉, 글자를 하나씩 읽지 않아도 단어의 형태만 보고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방법이 효과를 발휘하려면 첫 글자를 대문자로 쓰고, 나머지는 소문자로 쓰는 형식이어야 합니다. 단어는 획의 높낮이에 따라 독특한 형태를 가지는데, 이는 모두 대문자로 표기된 글자와는 달리 각 단어를 쉽게 구별할 수 있게 합니다. 모든 글자가 대문자일 경우, 단어의 형태는 단순한 직사각형이 되어버려 구별이 어려워집니다.
결국, 트랜스포트 서체는 표지판 서체로 채택되었고, 영국 도로망의 얼굴을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나아가 영국 그 자체의 이미지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족 키니어와 마거릿 칼버트는 영국 도로 표지판을 통합하기 위해 트랜스포트 서체를 디자인했지만, 이 서체는 너무나도 성공적이어서 덴마크, 그리스, 홍콩, 아이슬란드, 아일랜드, 이탈리아, 포르투갈, 스페인, 중동 등 전 세계 여러 나라에서도 채택되었습니다.
트랜스포트 서체는 시대를 초월하는 디자인의 대표적인 예시입니다. 탄생 이후 거의 60년이 지난 지금도 처음 설계된 목적 그대로 아무런 문제 없이 기능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영국의 모든 도로 표지판은 여전히 족 키니어와 마거릿 칼버트가 디자인한 트랜스포트 서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현대 영국 디자인의 일부이자, 영국적 풍경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트랜스포트 서체의 특징은 깔끔하면서도 너무 딱딱하지 않은 친근함 때문에 많은 영국인들은 트랜스포트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지만, 만약 도로 표지판이 없는 상태에서 이 서체를 본다면 본능적으로 '영국적이다'라고 느낄 것입니다.
녹색 배경에 흰색으로 쓰인 트랜스포트 서체는 이제 영국 시골 풍경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생울타리, 시골 오두막, 컨트리 펍, 오리 연못, 소 떼, 그리고 1960년대 마이크로웨이브 송신탑 같은 요소들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며, 운전 중 마주치는 익숙한 장면을 이룹니다. 최근 마거릿 칼버트는 이 서체를 디지털 환경에 맞게 재설계했고, 현재는 영국 정부 공식 웹사이트 www.gov.uk의 기본 서체로 사용되는 등 활용 범위가 넓어졌습니다. 교통 시스템을 위해 개발된 트랜스포트는 이제 영국 전반에 걸쳐 쓰이는 공공 서체로 자리 잡았습니다. 족 키니어와 마거릿 칼버트는 도로망에 이어 British Railways의 서체 개혁도 주도하며, 영국 타이포그래피의 지형을 바꿔 놓았습니다.
출처
Tim Fendley. (2020 Dec 1). Pioneer of modern information design. https://www.appliedinformation.group/
Independent. (2015 Aug 23). Kinneir and Calvert: Graphic designers behind Britain's road signs to be celebrated 50 years after revolutionising our highways. https://www.independent.co.uk/
Eyes Magazine. (1999 Winter). A design (to sign roads by). www.eyemagazine.com
Calvert And Kinneir’s Road Signs And Design Classics. (2015 Aug 19). Calvert And Kinneir’s Road Signs And Design Classics. https://flashba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