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긴, 경기도 고양시 행신역

by 임진채


1.

종일 비가 내린다. 1월 중순도 채 지나지 않았으니 비가 아니라 눈이 쌓여야 하는 계절이다. 그러나 그런 법은 육법전서에는 없다. 궁예가 집권하던 시절에 관습법이라는 것에는 있었던 것 같은데 이젠 그 법은 사라지고 없다. 아무리 법이 없어졌다고 이런 엄동에 종일 비가 내리는 것은 좀 거식하다.


내가 맞이방에 들어와 노트북 차릴 자리를 살피고 있는데, 아직 어린(?) 젊은이 두 명이 사력을 다해 고함을 지르며 뛰고 있다. 나는 창가에 앉아 있으니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잘 보인다. 그들이 아무리 빨리 뛰어도 열차는 이미 출발한 뒤다. 그 단말마적 안타까움을 누구도 어떻게 할 수는 없다. 딱 오 분만 일찍 나왔더라면 이런 참사는 없었을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공자님인가, 어느 분이 만사 불여튼튼이라고 하셨다. 세상은 점점 살기 어려워지고 있다는 것을 요즘 젊은이들은 모른다. 두 젊은이는 정말 억울한지, 어딘가를 향해 손가락질하면서 나오고 있다.


2.

안개가 자욱하게 낀 것이 애틋한 애정 영화의 한 장면을 보고 있는 기분이다.

이런 배경에, 열차 창을 올리고 우수에 찬 아가씨가 상체를 내밀어 누군가를 애타게 찾는 모습이 보인다. 열차는 서서히 출발하는데 아가씨가 기다리는 사람은 화면에 안 나온다. 열차는 점점 속도를 내고 더불어 아가씨의 몸도 콩알 크기 정도로 작아진다.

그때 에스컬레이터를 뛰어 내려오는 청년이 있다. 급하게 서두르다 다리가 꼬여 기어이 엎어지고 만다. 고개를 처박은 채 에스컬레이터에서 밀려 내려오던 청년은 겨우 몸을 일으켜 앞을 내다본다.

거기에 열차는 사라지고, 두 줄 철로의 휑한 그림만 클로즈업된다.

절룩거리며 발을 옮기던 청년은 기둥을 쓸어 안고 주먹으로 때리기 시작하는 것으로 화면은 스르르 꺼진다.


화면이 바뀌고 전 법무부 여성 장관이 야릇한 미소를 띠고, “소설이 아니라 영화를 찍고 있네·····. 한다.



3.

내가 이곳 행신역에 드나든지 한 달이 넘었을 것이다.

며칠 전부터는 이 맞이방을 나 혼자 통째로 사용하고 있다. 이 행신역 맞이방의 크기는 서울역이나 용산역에 비교할 수는 없으나 그래도 아주 넓다.

그 큰 공간을 내가 혼자 사용한다는 것을 상상해 보라. 소유권이 내 앞으로 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사각의 한 꼭짓점에 노트북 펴고 나 혼자 앉아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는 말이다.

광각렌즈로 조금만 밀어내서 촬영하면 축구장 몇 개 정도의 넓은 공간이 다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그 요령? 별것 없다. 변방 역이어서 열차 배차가 그리 촘촘하지 않다. 열차 한 대가 떠나면 맞이방에는 거의 사람이 없다. 이곳은 아무 때나 오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배차 시간을 알면 나 혼자 오붓하게 이 공간을 독차지할 수 있다. 이 넓은 공간은 여행객이 한 사람도 없어도 난방을 안 할 수 없다. 그래서 나같이 좀스러운 사람은 이곳은 정말 안성맞춤이다.



4.

지금까지는 농담이었고, 이곳에 나오면서 항상 이 공간에 문화적 개념을 가미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오래전에 광주 송정역에 간 적이 있는데 그곳 맞이방 한쪽에 전원을 갖추고 편한 자세로 이용할 수 있는 의자와 책상이 있는 별도 공간이 있었다. 물론 유에스비를 쉽게 연결할 수 있는 장치도 준비되었다.

내가 거의 한나절을 그곳에 앉아 있었는데 그곳을 이용하는 여행객들이 끊이지 않았다. 자리가 부족해서 기다리는 사람도 있었을 정도다.


지금은 노트북이 그렇게 희귀한 게 아니다. 나 같은 늙은이도 일상으로 사용하는 게 현실이 아닌가 말이다.


이 행신역은 새로 지은 청사라서 여유 공간은 어차피 있는 것이고 책상과 의자 그리고 전원시설만 준비하면 훌륭한 문화공간이 될 것이다.


어느 경로로 내 뜻을 전할지를 모르겠다. 도와주실 분이 있다면 정말 감사하겠다.



2023. 01. 16, 새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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