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뭐 하세요?

by 임진채

벤치에 앉아서 메모하는데 남자 노인 한 분이 작심한 듯 곁으로 다가와 묻는다. 어제는 강아지를 끌고 가던 중년 여자분이 말을 걸었었다. 그런 분이 제법 많은데 항상 묻는 말이 똑같다.

“시를 쓰는 중이세요?”


나를 왜 시 쓰는 사람으로 생각했을까? 벤치에 걸터앉아 노트를 펴놓고 편치 않은 자세임에도 상당 시간 손 놀리는 것을 번연히 보면서도 정제된 언어를 구사해야 하는 시를 쓰는 것으로 생각하지?


내가 “예. 저는 글을 쓰는 작가입니다.” 하면 이야기가 순조롭고 다양한 질문이 오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거짓말해야 할 이유가 없다. 젊었을 때 작가를 지망한 건 사실이지만 늙어버린 지금까지도 나는 작가라는 호칭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그 사실을 말하면, 실망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글을 매개로 할 이야기는 더 이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분들이, 그러면 왜 글을 쓰는 것 같은 모양을 취하고 앉아 있느냐고 다그칠 수도 없는 일이다. 대개는 이 대목에서 머뭇거리다 물러가는 게 보통이다.

내 처지에서는 곤혹스럽다. 찜찜하고 서럽기도 하다. 하는 김에 조금만 더 힘을 쏟았으면 등단할 수도 있었을 건데·····.


처녀가 애를 낳아도 할 말이 있다고 했다. 말을 시작한 김에 내 하소연이나 하자. 물어서 대답하는 형식이면 가장 좋은 그림인데, 묻지 않으니 내가 자청해서 나설 수밖에 없다.


나는 허리가 안 좋은 사람이다. 의학적으로 말하면 5번과 6번 척추가 탈골과 협착이라 한다. 새벽에 119구급차를 여러 번 탄 사람이다.

구급차를 처음 탄 얼마 후에 마누라님이 내게 말씀하셨다. 주위에 쪽팔려서 못 살겠으니 이사 가자고 하셨다. 새벽 3시에 구급대원의 부축을 받으며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던 내가 죽는다고 고함을 질러서 온 온 동네 사람이 잠을 못 잤단다. 그게 발단이 되어 요즘은 허리 아픈 분들이 경험담을 들으러 오는 정도니 그게 남사스러워서 이사 가고 싶으시단다.


수술을 안 하고 버티고 있다. 그래서 오래 걷지 못한다. 운동이랍시고 나가면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 인간이 항상 벤치에 앉아 쉬는 게 마음 편할 리가 없다. 그래서 노트를 펴고 생각나는 말을 쓰기로 했다. 생각나는 말이 없으면? 처음에는 머뭇거리다 그냥 일어나곤 했는데, 한 자도 못 쓸 때가 많아서 지금은 강압적인 방법을 쓰고 있다. 쓸거리가 생각날 때까지 죽치고 앉아 있는 방법이다.


그런 내가 같이 걷기 운동하는 사람들의 눈길을 끈 이유는?

나는 머리가 완전 백발이다. 짧게 자르지 않고 파마를 했으며 길게 길렀다. 외모로만 따지면 요즘 소문 난 천공보다 훨씬 더 기괴하게 생겼다. 그런 인간이, 운동하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산책로의 벤치에 앉아서 뭔가를 끼적이고 있으니 관심을 보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이 대목에서 제일 중요한 건 당사자인 내 심정일 것이다.

언젠가부터 나는, 늦가을에 심하지도 않은 바람에 힘없이 굴러다닐 수밖에 없는 낙엽 중 하나인 기분이다.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다. 이른바 낙엽인 그들은 그들의 자리에서 이미 배제(排除)된 존재다. 땅에 떨어졌으니 기약된 내일이 있을 수 없다.

작년에 시 소속 인부들이 낙엽을 긁어모아 자루에 꼭꼭 눌러 담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후의 행방은 알지 못한다.


그날 밤 혼자 소주를 마시던 기억을 나는 아직 지우지 못하고 있다. 이제 봄이 되어 그 나무에 새로운 잎이 솟았지만, 작년의 그 잎은 아니다.


나무에 돋아 있는 저 개체(個體)들은 한낱 소모품에 지나지 않는가? 그렇다면, 나는?



2023.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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